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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89

누르하치, 나는 오랑캐다 1583년 한 젊은이가 명나라 군사들에게 쫓기는 몸으로 백두산에 숨어든다. 얼마 후 그는 의협심이 가득 찬 여진 소년 7명과 의형제를 맺고 13명의 기갑병으로 처음으로 군사를 일으킨다. 비록 그에게는 아버지가 남긴 13벌의 갑옷 밖에 없었지만, 이는 13명의 창업 동지의 몸을 감싸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거병을 했어도 다른 동지들은 쉽게 모이지 않았다. 게다가 일족들도 외면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자 마저 나타났다. 얼마 지나자 그 밑에는 30여명의 동지들과 수하의 100여명의 부하가 생겨난다. 사나이는 이제 최소한의 자원을 가지고 뜻을 펴고자 일어선다. 때마침 조선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동북아의 세력판도를 급변시켰고, 그는 이 틈을 타 사분오열되어 있던 자기 부족을 통합시켜 나간다. .. 2010. 4. 25.
광개토태왕비는 태왕의 일생기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재임기(391~412)에 이르러 재도약의 전기를 마련한다. 이 시기는 우리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중차대한 역사적 전환점이 된다. 즉, 고조선 이후 오랫동안 염원해 온 고토회복의 기회를 결정적으로 다시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왕호 그대로 태왕은 ‘토경(土境)’을 널리 열고 국세를 내외에 떨친다. 이는 빛나는 외정(外征)의 결과였다. 하지만 태왕의 경영 성적이 단순히 외정(外征)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즉, 태왕시기 ‘광개토경(廣開土境)’의 본질은 외적 팽창과 더불어 중앙집권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내정 혁신을 통해 내외 문제를 해결하고, 이를 한 차원 높여 국가 경쟁력으로 업 그래이드 한 것이다. 능비는 .. 2010. 4. 25.
광개토태왕, 시대의 부름에 응하다 태왕이 등극한 시기는 오늘날 분단으로 인해 국운 융성이 가로막혀 있는 한반도가 처해 있는 여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기였다. 선대왕인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국가체제를 크게 개혁하기는 했지만, 민심은 여전히 분열되어 있었다. 또한 중국의 5호 16국 시대라는 말이 웅변하듯 국내외 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 같은 상황에서 태왕은 18세 소년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나아가 그는 재위 20여년 만에 광대한 대제국을 이룩해 낸다. 그는 어떻게 이 같은 엄청난 위업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태왕의 왕위 계승은 역사적 필연성을 갖춘 드라마틱한 과정이었다. 부친인 고국양왕은 원래 소수림왕에 이어 왕위를 계승하기 전에는 그저 왕제(王弟)로서 군중(軍中)의 한 장수에 불과했다. 그런 이유로 고국양왕의 태자인 담덕(談德).. 2010. 4. 20.
중국대륙을 M&A한 청태조 누르하치의 경영 비결 겨레의 숨결이 스며있는 광활한 만주는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다. 불과 1천 여 년 전에는 ‘천하 경영’을 앞세운 광대한 제국, 고구려가 역사의 중심으로 우뚝 솟았고, 그 후로는 불운한 조국, 발해가 이 땅에서 명멸해 갔다. 빈 땅엔 풀씨가 날아들 듯, 그 후로 이 땅은 영원히 잊혀지는 듯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오랜 시간 중국의 압제를 받아 온 여진족이 초원의 잡초처럼 무성하게 일어났다. 금(金)에 이어 두 번째로 세운 나라가 청(淸)이다. 여진족의 청은 서쪽으로는 부패할 대로 부패한 명(明)과 맞닿아 있었고, 동남쪽으로는 임진왜란으로 피폐된 조선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다. 청을 세운 이들 여진족은 강대국 틈바구니 숨어 보이지 않게 힘을 축적해 나갔다. 기나긴 굴욕의 세월 끝에 그들은 드디어 창업에 성공하게.. 2010. 4. 6.
왜, 지금 광개토태왕인가? 고구려를 세계제국으로 확장시킨 우리 역사상 최대영토를 개척한 태왕의 이름은 ‘담덕(談德)’이다. 중국 측 기록인 『진서(晉書)』에는 ‘안(安)’이라고 적혀 있다. 태왕은 374년에 태어나 제 18대 임금인 고국양왕 재위 3년(38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6년 뒤인 392년 5월에 제19대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태왕의 큰아버지는 소수림왕이며, 아버지는 소수림왕의 동생인 고국양왕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태어날 때부터 체격이 웅위하고 기상이 늠름했으며, 뜻이 고상하고 성인(聖人)의 풍모를 지녔다.”고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나 권근의 『양촌집』에도 태왕이 “허우대가 매우 크고 활달한 뜻을 가졌다”, “어렸을 때의 모습이 체격이 웅위하고 뜻이 높았다.”고 동일하게 전하고 있다. 기록.. 2010. 4. 6.
큰 나라 고구려: 고구려인들과 글로벌 리더십 제국적 국토영역은 고구려로 하여금 여러 부족이 연합한 국가를 이루도록 만들었다. 창업 이래 지속적인 확장의 결과였다. 고구려에는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탁노부(濁奴部)·계루부(桂婁部)의 다섯 부족이 있었다. 평양으로 천도하고 부터는 혈연적인 오족제도(五族制度)에 지연적인 요소를 가미해 오부제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고구려 사회는 대체적으로 혈연적 부족사회를 기반으로 했다. 부족제도에서 통치자는 부족들의 선거에 의해 결정되었다. 3세기 말엽 기록에는 처음에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뒤에 차츰 약해져서 계루부에서 대신 왕이 나왔다고 전한다. 또한 고구려는 적극적으로 서진정책을 펼쳐 요동(遼東)·현토군(玄菟郡)을 서쪽으로 후퇴하게 했다. 이런 활동의 결과 태조 때에 와서 고구려 영토는.. 2010. 4.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