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사가들에 의해 미켈란젤로는 괴팍하고 불친절하며 다른 화가의 천재성에 질투를 했던 인물로 그려지곤 한다. 물론 그의 성격이 비사교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는 적지 않은 제자를 양성했으며 평생 다른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공방 제자와 조수들은 몇 개 장소에서 동시에 작업했고, 로마에 있는 근거지에서는 미켈란젤로가 없을 때도 정상적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어떤 조수들은 오랫동안 미켈란젤로와 함께 일했다. 그중에서도 ‘우르비노’라고 불린 프란체스코 다마도레(Francesco d'Amadore)는 20년 동안이나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고 미켈란젤로를 도왔다. 미켈란젤로는 그런 조수들, 하인, 석공과 석수 등을 폭넓게 후원했다.
대형 주문이 들어올 경우에는 피렌체의 성당 작업에서 알게 된 조각가와 인부 등의 인력을 고용했다. 그는 늘 이득이 많은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배분하였다. 이런 식으로 미켈란젤로는 광범위한 후원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주변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다. 마르첼로 베누스티(Marcello Venusti)나 다니엘레 다 볼테라(Daniele da Volterra) 같은 화가들도 있었고, 미켈란젤로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개성을 잃지 않은 화가, 조각가들도 많았다. 일각에서 주장하듯이 미켈란젤로가 일부러 평범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만 받아들였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노년의 미켈란젤로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 사건은 하인이자 조수였던 우르비노가 죽은 것이었다. 1556년의 한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어제 저녁에 슬프게도 프란체스코, 즉 우르비노가 세상을 떠났다. 내게는 견딜 수 없는 충격이어서 차라리 그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그와 함께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는 아주 선량하고 너무도 헌신적이고 충직한 사람이었다. 그가 죽고 난 뒤 난 이 세상에 혼자 남은 기분이다. 어떤 것도 내게 평화를 가져다줄 수 없는 심정이다.”
이후 미켈란젤로는 우르비노의 홀로 남은 아내와 두 아이를 부양했고, 아내가 재혼한 뒤에도 계속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극진한 후학 사랑과 베풂은 어린 시절 자신이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받은 호의와 배려를 생각하며 일종의 책임감을 느낀 것일지 모른다. 소년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발견한 로렌초 데 메디치는 그를 늘 가족처럼 가까이 대하고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해결해 주며 미켈란젤로를 책과 건축의 새로운 세계로 안내했다. 그는 자신의 진가를 알아준 로렌초에게 평생 감사했다.
미켈란젤로는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와 후원세력, 그리고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한 배려로 많은 추종세력을 거느릴 수 있었다. 문화 예술에 대한 깊은 조예와 후원이 없는 사회는 메마른 대지와 같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