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11 [ 누르하치]한족(漢族)의 허구적인 적자 확대론 에 맞서다 한족(漢族)의 허구적인 적자 확대론 누르하치 시기에도 대(對)중국 무역은 활발해 약 200명에서 600명에 이르는 여진족 사신들이 북경을 방문했다. 방문할 때마다 이들은 그들의 지도자만큼이나 영리한 방법으로 명 조정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파악하고, 수집했다. 누르하치의 전략상 가장 뛰어난 것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 첩보전은 이미 이 시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우려해 명은 남여진의 북쪽 경계인 무순에다가 마시(馬市)를 세워 여진사신들이 만리장성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또 망루를 세워 각기 5명의 군사로 수비케 하여 여진 부족원들의 이동을 철저히 감시, 경계하였다. 나아가 회유책도 동원했다. 이는 한족이 오랜 역사 동안 변방의 민족에게 써오던 지극히 일반적인 수법이었다. 예를 들어.. 2012. 3. 14. 소에 고삐를 묶다 vs. 소, 고삐에서 풀리다 명(明)으로 봐서 이제 누르하치는 완전히 고삐 풀린 소의 모습이었다. 한족이 역사적으로 항시 우려한 게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변방에서 일어나는 이민족의 도전을 막고자 한족은 오래전부터 ‘위(衛)’라는 군사단위를 설치한다. 나아가 지방의 부족장을 통해 이민족의 각 부족들을 통제하는 간접 지배 방식을 취했다. 당연히 이 부족장들은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사람들로 채워졌으며, 지위를 세습시킴으로써 한족은 그들로부터 지속적인 충성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중국은 이 같은 소고삐 정책을 통해 변방을 중국의 행정체계에 편입시키려 했고, 이민족에 의한 이민족의 지배라는 이이제이 방식으로 친중 사대정권을 수립했던 것이다. 이는 현재에 와서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한족의 대(對)변방 정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몽고.. 2010. 7. 27. 제물에서 주역으로: 경쟁 우위를 확보하다 누르하치 성공 배경에는 항시 요동이 자리 잡고 있다. 요동은 여진족에게는 남만주(南滿洲) 지역에 해당된다. 요동에 대한 지배는 풍부한 곡창 지대에 대한 경략권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안정적인 식량 공급원을 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동은 여진족과 명의 접경지대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워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최고의 전략거점이었다. 나아가 요동은 해상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뱃길로는 가장 짧은 거리로 중국에 가 닿을 수 있었다. 만리장성이 끝나는 바닷가와 맞닿은 철의 요새가 바로 산해관이었고, 그 관문을 통과하면 눈앞에 북경이 닿을 것 같았다. 누르하치가 요동을 눈여겨 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적과 대립하는 접점 가까이 군사들을 배치할 수 있는 이 같은 교두보는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한 조건이었.. 2010. 7. 27. 적에게서 배워라 그렇다면 청이 건국되는 1600년대에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가? 유럽에서는 신대륙이 발견되었고, 세계사적 흐름은 전지구적 현상이었다. 청조는 근대 중국을 잇는 가장 가까운 왕조로 출범해, 몽골의 원(元)을 빼고는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민족과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해 현대 중국에 넘겨준 왕조이다. 그 무렵에 중국에서는 소수 민족인 여진족이 오랜 기간 한족을 지배하고 유지하는 경이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진족의 성공 이유에 대해 에드윈 O. 라이샤워와 존 K.페어뱅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1)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 (2) 유리한 시기의 도래 (3) 제부족의 통일 (4) 공통되는 민족명의 부여 (5) 공략에 대한 동기부여 (6) 자손까지 이어진 대업 완수와 후손에 의한 중국.. 2010. 7. 27. 누르하치를 만나러 가는 길 나의 이번 답사 여행은 마침내 거병 66년만에 중국 대륙을 집어 삼킨 청태조 누르하치와 홍타이지 가계로 이어지고 있었다. 명나라 두송이 군사의 태반을 잃은 혼하는 유유히 흐르고, 허투알라로 들어 서는 길, 비가 뿌린다. 누르하치의 조상을 모신 청영능에 들어 서는 길은 한적하고, 길은 열려 있다. 건물마다 제기가 차려져 있고, 무덤엔 영혼이 부활하라는 비나리가 담긴 나무가 자라고 있다. 불현듯, 여진족의 야생성은 아직 살아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대한민국 중소기업 CEO들을 모시고 나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와 함께 떠나는 답사 여행의 제목 을 이끌면서 참 많이도 느끼고, 감회에 젖었다. 1300년 전부터 400년 전을 거쳐 현재로 이어지는 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숨통을 닫았다 다시 열기를.. 2010. 6. 22. 두 손이 자유로우면 천하를 지배 한다 역사적으로 철제 등자(鐙子)의 등장은 이들 유목민들의 손을 자유롭게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등자는 말을 탈 때 디디는 제구를 말한다. 적어도 3, 4세기까지 유목 기병들은 아시리아의 발판과 스키타이 인디안의 발(足)거리 쇠사슬처럼 철제 등자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제 말을 타면 두 발을 지탱할 수 있었고, 이는 두 손의 자유를 가져왔다. 가히 획기적인 발명품이 인류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두 손의 자유는 말 위에서 활을 쏠 수 있는 기술을 급격히 강화시켰다. 이제 승마인들은 활을 당기면서 안장 발거리를 딛고 안전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등자는 말 엉덩이 너머로 쏘는 파르티아식(式) 활쏘기를 가능하게 했다. 우리나라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활쏘기는 바로 이 같은 장면을 잘 보여주고 있는 .. 2010. 5. 15.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