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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세종 | 창조의 CEO

[창조의 CEO 세종] 빌려 온 것도 우리 것으로 만든다

by 전경일 2009. 2. 3.
 

세종은 ‘벤치마킹(bench marking)’과 ‘아웃소싱(out-sourcing)’의 대가였다. 그가 새로운 CEO로 사령탑을 맡은 신생 조선은 무엇이든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외부로부터 활발한 문화적 교류와 선진 외래문화의 흡수는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에 근거한다. 그만큼 그 시대는 국가 경영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빌려와야 했고, 찾아내야 했으며, 또 참고로 해야 했다. 그것이 그 시대가 필요로 했던 경영 방식이었다.


한 시대의 분위기에 맞는 경영 방식, 그것은 원칙적으로 지켜야 할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다 바꾸고, 조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예컨대, 세종의 경우, 국가 CEO로서 창업 이념의 계승이나, 경영의 대상인 백성을 위한 풍요로운 사회건설 등은 결코 바뀔 수 없는 대전제였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얼마든지 세상의 조류에 맞춰 바꿔 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엇인가 처음으로 해 낸다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매력적이기도 하다. 더구나 주변에 끌어 모을 수 있는 ‘자원(resource)’이 풍부하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세종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환경에 놓여 있던 CEO였다.


[시대적 분위기에 맞는 경영을 하라]


세종을 얘기할 때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가 단순히 어디선가 빌려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빌려온 것도 ‘새로운 조선’이라는 항아리에 집어넣어 새로 주조(鑄造)해 ‘조선만의 것’ ‘우리만의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 냈다. ‘멜팅 팟(melting pot)’이라는 개념이 여기에 적합할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범세계적인 것’으로 승화시켜 나갔다.


그 자신 지나칠이 만치 공부벌레였고, 리서처(researcher)였기 때문에, 세종은 어디서 무엇을 빌어 와 써야 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자신이 컨셉을 빌려 온 ‘집현전’은 이같은 조사 및 자문활동을 충실히 수행해 주었다. ‘집현전’은 정말 믿고 키워주고 싶은 조직이었다. 세종은 자신의 핵심요원들을 통해 노하우(know-how)와 노웨어(know-where)를 다 알고 있었고, 이것을 자신의 경영에 적극 활용했다. 그가 빌려온 것들을 살펴보면, 그것은 단순히 일회용의 것들이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로 ‘집현전’은 역사에서 빌려와 자신의 시대에 적극 활용한 조직명이기도 했다.


[세종, ‘집현전’ 컨셉을 빌리다]


원래 ‘집현전(集賢殿)’은 당나라 황제 현종 때(724년) 만들어진 황립학술기관의 이름이었다. ‘집현전(集賢殿)’이라는 명칭도 이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집현전’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인종대인 1136년부터였다. 그러나 그 시기에는 ‘집현전’의 활동이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다 인재를 담아내는 지적 이너서클(inner circle)의 필요성 때문에 세종시대에 이르러 주목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역사에 두루 밝았던 세종은 역사 속에서 ‘집현전(集賢殿)’이라는 이름을 찾아냈고 마침내 역사로부터 이것을 스카웃해 자신의 가장 강력한 싱크 탱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변계량의 아이디어가 큰 몫을 차지했다. 고제(古制)와 고전(古典)에서 ‘죽었던 신화’를 다시 끄집어 내 리메이크(remake) 하면서 세종은 신생 조선에 강한 활력을 불어 넣었던 것이다. 그것은 고려가 젊은 피를 수혈 받지 못해 쓰러졌던 것과 사뭇 달리 조선 내부의 문제에서 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젊은 피를 갖고 태어난 조선은 유구한 역사에서 검증된 경험을 자신의 에너지로 끌어다 연료로 태워야 할 필요성을 무엇보다도 강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ㆍ구의 통합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젊은 피를 갖고 태어난 조선]


세종의 벤치마킹과 아웃소싱 사례는 사실 가장 대표적이며 광범위하게 국가 경영 철학에서 나타난다. 삼국시대에 한국에 소개된 유교는 한국의 정치적ㆍ사회적ㆍ지적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국가 경영 철학이었다. 이것은 심지어 한국 역사에서 불교에 공식적인 종교적 지위가 주어졌던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불교가 비록 통일신라와 고려의 국교였지만, 유교는 두 국가의 지적ㆍ구조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그것을 이성계와 그의 추종자들은 고려왕실과 귀족에 대항하여 싸우고 불교의 우상숭배를 공격하며 사회정의를 수호하기 위한 철학적 기반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 경영 철학의 ‘자국화ㆍ내재화ㆍ멜팅화’는 우리 민족의 강한 동화성과 동화력의 상반되는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유ㆍ불ㆍ선이 습합되는 거대한 사상적 금괴를 이루게 된다. 실제 이런 현상은 현재에 이르러서도 부단히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수많은 철학적 개념과 종교가 뒤섞인 나라도 흔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종교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이에는 종교를 뛰어넘어 다분히 유학적인 우리만의 고유한 공유 질서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사상도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그 순간부터 그 자체의 고유성을 상실하고 우리의 문화에 녹아 버린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놀라운 우리 문화의 힘인 것이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