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법 질서 무릅쓰고 3남을 왕세자 삼은 이유는
장남 양녕에 대한 철저한 인사 검증 거쳐 배제
신료들 '택현론'도 한 몫…현명한 지도자 추천
지도자가 걸어온 길에서 국가의 운명 결정돼
세종 이도(李祹)는 3자로 태어났다. 그 때문에 태생적으로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신생 조선에서 셋째 아들을 국왕으로 세우는 것은 자칫 국제 문제로 비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국제 질서가 그랬다.
중국은 은나라 때부터 종법 질서의 개념을 세웠다. 이 개념에 의하면, 국제관계는 엄연히 대국과 소국으로 나뉘며, 이 둘의 관계를 사대(事大)와 자소(字小)로 정리해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동아시아 세계는 어느 국가든 중국의 힘을 부정할 수 없었고, 이 같은 중국 특유의 조공과 사대를 매개로 한 외교 형식은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지된다. 다시 말해 중국을 종주국으로 한 차등적 국제관계는 근 3000년 이상 유지되어 왔다.
중국 내부의 역사도 대국, 차국, 소국은 영토의 규모, 경제력, 인구 등에서 큰 차이가 있었고, 국가 성격도 확연히 달랐다. 춘추시대 중기에 들어서면 중원의 열국은 약소국이 되고, 변방의 열국이 대국(齊, 晉, 楚, 秦)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처럼 대외 관계는 엎치락뒤치락하며 종법 질서는 힘의 논리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 왔다.
세종이 국왕이 될 무렵, 조선은 중국이 리드하는 세계의 종법 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현실은 불만스럽더라도 인정해야만 한다. 조선에서 맏이를 왕으로 세우지 않으면, 이는 자칫 종법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읽힐 우려가 있었다. 조선으로서는 당연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중대사였다.

3자인 충녕(세종대왕)이 아무리 출중해도 왕세자가 될 수 없는 건 명확 부동했다. 오죽했으면 부왕인 태종조차 충녕에게 “너는 할 일(왕이 될 가능성)이 없으니 딴 생각 말고 평안히 즐기기나 하여라”(태종 13년 12월 30일)라고 일찌감치 못 박았겠는가? 이때가 충녕이 17살 되던 해였다.
이로부터 5년 뒤에도 태종은 “장차 장손(양녕)에게 나라를 전하는 것은 고금의 상전이니 다른 마음이 없으며 여기에 의심이 있다면 천감(天鑑, 하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 마땅히 의정에 고하라”(태종 18년 5월 10일)고 말해 양녕의 지위를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5월 10일부터 이어진 칼날 같은 인사 검증을 거듭한 결과, 23일 후인 6월 2일 조종의 의사결정은 완전히 뒤집히고 만다. 이날 왕세자가 양녕에게서 충녕으로 급히 자리바꿈한 것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불과 69일이 지난 8월 10일 충녕은 태종을 이어 조선의 제4대 국왕에 오른다. 그야말로 차기 대권 주자 확정에서 집권에 이르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대체 조정 내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태종 18년 들어 조선 정부에서는 차기 국왕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차기 국왕으로 양녕을 염두에 둔 태종의 마음엔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태종뿐만 아니라, 당시 조종 신료들에겐 중대 고민이 있었다. 요즘 말로, 신생 조선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는 문제였다. 국가가 계속 이어지고 번영하려면 누가 차기 국왕이 되어야 하는가? 후계 문제가 중대하게 논의됐다.
앙녕은 적장자임이 틀림없으나, 신료들은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 끝에 중국 주나라의 성군 문왕이 백읍고가 맏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둘째 아들 무왕에게 왕위를 물려준 역사적 선례를 찾아냈다. 이를 통해 내외의 반발을 잠재우고 전격적으로 왕세자 교체에 나선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양녕은 자기가 차기 국왕이 될 줄로 알았는데 여론이 급변했다.
이때 조정 신료들 사이에 부상한 ‘차기 국왕론’이 이른바 ‘어진 사람(현명한 사람)’으로 하여금 차기 국왕이 되게 하여야 한다는 ‘택현론(擇賢論)’이다. 택현론을 등에 업고 세종은 차기 국왕 후보자로 급부상한다. 이는 실은 신료들을 동원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한 ‘정치 8단’ 태종의 뜻이었다고 보는 게 맞다. 아무리 양녕이 장자일지라도 국가 운영 문제는 전혀 다른 사안 아닌가.

양녕이 국왕이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태종은 그 이유를 뚜렷이 밝힌다.
“(양녕은) 적장자이긴 하지만, 사람됨이 광포·미혹·음란하고, 유생을 멀리하고, 학문을 게을리하였다. 또 오락이나 성색에 빠져 ‘어리’라는 남의 첩을 궁중에 끌어들이고, 군소배들과 사통하여 불의한 짓을 했다”
태종이 양녕을 차기 국왕 후보에서 탈락시킨 이유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태종이 ‘공인(公人)의 조건’에 대해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종이 말한 공인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불혹(不惑) 해야 한다. 국왕이 될 자가 미치광이처럼 폭거나 일삼고, 남의 말에 혹(或)하기만 한다면, 어찌 중심을 잡고 국가경영을 해나갈 수 있겠는가? 절대로 혹(或)해서는 안된다.
둘째, 사친(私親)해서는 안 된다. 국가의 일에 사적 이해관계를 개입시켜 공적 신뢰가 무너지게 해서는 안된다. 양녕은 군소배들과 매사냥이나 다니고, 기생 어리와 놀아나는 등 사적 관계에 흠씬 빠져 있었다. 이는 공기(公器)로서 국왕이 되기에 절대적으로 함량 미달이다. 또한 군소배들에게 둘러싸여 자신에 대한 평가는 물론, 민의를 들을 수도 없었다.
셋째, 불의(不義)해서는 안 된다. 국왕의 될 자는 만백성과 신료를 이끌고 갈 우두머리이기에 무엇보다도 정의로워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 백성이 있어 기꺼이 따르겠는가.
태종이 눈물을 머금고 양녕을 내친 이유다. 그러면 차자인 효령은 어땠을까? 태종은 “(효령은) 자질이 미약하고, 성질이 너무 곧아 개좌(開座)의 능력이 없다”며 왕이 될 수 없다고 평했다. 개좌의 능력이란 한마디로 국왕으로서 ‘용상을 열어 나갈 역량’을 말한다. 만약 회사의 사장 자리에 대리가 가서 앉고, 대통령 자리에 시정의 술주정뱅이가 가서 털썩 주저앉아 있다면 어찌 되겠는가? 자리는 인물의 그릇 크기에 맞게 배정돼야 한다.
태종은 얼음장처럼 냉철하게 판단했다. 결코 휩쓸리거나, 솔깃하여 차기 국왕 선정이라는 막중대사를 그르치지 않았다. 태종이 왕자의 난을 주도하는 등 수많은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차기 국왕 선정이라는 역사의 디딤돌을 단단히 놓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지금의 상황에서 매우 중하게 돌아보아야 할 대목이다. 지난 3년의 반(反)역사이자 패악, 패덕의 망사(亡史)는 한마디로 국가적 인사 대참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백성(국민)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사에 대체 무엇을 인사 검증하였기에 나라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국정 책임자들의 통렬한 자성과 비판이 뒤따를 때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될 것은 자명하다. 다만, 옛날과 차이는 이 같은 검증 작업을 이제는 국민이 온전히 두 눈을 부릅뜨고 수행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럴 때 국가는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간다. 나라의 주인이 이젠 임금이 아닌 국민이기 때문이다.
신하들의 주청대로 충녕은 ‘택현론’의 수혜자가 될 만했다. 태종의 충녕에 대한 평을 보면 이 점은 확연히 드러난다.
“충녕대군은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 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하였다. 그러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또 치체를 알아서(識治大體) 매양 큰일에 헌의(獻議, 의견을 개진) 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한 생각 밖에서 나왔다.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壯大)한 놈이 있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하다. 충녕대군이 대위(大位, 즉 왕세자)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태종은 충녕을 왕세자로 임명한 까닭을 호학(好學)하여 학문을 가까이하였고, 부왕의 ‘큰 책’도 가져가 읽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종이 가까이 두고 섭렵한 ‘큰 책’은 국정운영과 관련된 <대학연의> <자치통감> 등을 말한다. 17세 무렵 부왕이 “너는 안 된다”라고 단언했을 때부터 세종은 더욱 절치부심 노력했다.
태종의 평가처럼 국가를 다스리는 큰 뼈대인 ‘대체(大體)’를 꿰뚫어 보았고, ‘생각 밖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못하는 참신한 국정운영 아이디어를 제출했다.
여기에 더 얹어 정치 8단인 태종은 다음 수를 내다보았다. 차기 왕위를 세종에게 넘기면 ‘그 아들 가운데 장대(壯大)한 놈’이 있어 조선이 무난하게 수성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장대(壯大)한 놈’? 세종은 17세에 문종을 낳았다. 세종이 22세 국왕이 될 때 문종의 나이 5세였으니,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넘기면 문종이 차차기 왕위를 물려받아 더욱 탄탄하게 나라를 이끌고 갈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역시 정치 대가다운 긴 안목이다.
신료들은 태종의 결정이 옳았음을 밝히며 지지하고, 다른 한편 위로했다.
“충녕대군은 영명공검(英明恭儉)하고 효우온인(孝友溫仁)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게을리하지 않으니, 진실로 저부(儲副, 세자)의 여망에 부합합니다” 이는 충녕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공손하고 겸손하다, 효심과 우애가 깊으면서도 따뜻하고 인자하다는 의미다.
이에 태종은 다시 한번 목이 메어,
“내 (장자가 아닌 상태에 왕위에 올라 다음 왕은 장자를 세우고 싶었건만 자식 일이란 게 참 뜻대로 되지 않아) 부득이 제(禔; 양녕)를 외방(강원도 춘천)으로 내치고, 충녕대군을 세워 왕세자로 삼는다. 아아! 옛사람이 말하기를, ‘화와 복은 자기가 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내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애증의 사심(私心)이 있었겠는가? 아아! 중외의 대소 신료는 나의 지극한 생각을 본받으라”고 명하였다.
태종의 말처럼 ‘화와 복은 자기가 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양녕이나 세종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도 알고 보면 ‘스스로 지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 같은 일이 어찌 옛날에만 있었다고 하겠는가? 지금도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걸 우리는 눈앞에서 뚜렷이 보고 있는데.
태종은 차기 왕세자 선정에 대해 전혀 사적인 이해관계나 감정을 갖고 결정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칼같이 엄중하고 철저한 인사 검증의 태도다. 태종의 돋보이는 점이 바로 이런 것이다. 조선 27명 국왕 중에 사적 정리에 치우치지 않은 왕이 몇이나 있었는가? 태종은 부자 관계도 부자가 아니라 군신의 관계로 보았다. 철저히 공인다운 면모다.
창업과 수성의 시기여서 조선은 매우 중요한 인사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신료들이 그 주요 논거로 ‘택현론’을 내세운 것은 신의 한 수라 할 수 있다. 태종의 판단도 극찬할 만하지만, 당시 유정현, 박은 등을 비롯한 많은 대소 신료의 결정 또한 대단히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알다시피 국정운영을 하려면 제기되는 과제가 한둘이 아니다. 그 엄청난 국정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국왕은 무엇보다도 현명해야만 한다. 조선 조에서 세종과 정조가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국정 수행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택현론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지도자 판별법이다.
더불어 지도자가 어떤 이유로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왜냐면 그를 그 자리에 세운 이유가 그가 그 자리에 올라가서 할 일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택현’의 기대에 부응한 세종은 국왕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현명한 사람들을 모아 놓은 큰 집’, 즉 집현전(集賢殿)을 만들었다. 어떤가? ‘택현’의 수혜자답지 않은가?

현대사에서 이와 비슷한 예를 들어 보자. 만주군관 출신인 박정희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에서 10월유신을 따왔을 것이며, 이명박은 청계천 복원 사업에서 재미를 봐 대통령이 돼서도 4대강 사업을 벌였을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은 민주주의, 인권 운동에 평생 헌신한 결과 대통령이 돼서도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 통일 운동을 주창했다. 최근의 윤석열은 검찰 지상주의에 절은 탓에 대통령이 돼서도 폭넓게 보지 못하고 망령되이 행동해 종국에는 혼주(昏主)로 추락하지 않았나. 이 모두 상호 관련성을 띠고 있다.
따라서 지도자를 선출할 때 그가 살아온 일생이 국가의 모습이 될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 점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진실이다.
태종과 신료들의 부름에 응한 세종은 세자 책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명한다.
“임금의 자리는 반드시 돌아갈 곳이 있고 민심은 미리 정한 바가 있다고 생각하시와, 드디어 이 변변하지 못한 저로 하여금 높은 지위를 받게 하옵시니, 신은 삼가 마땅히 맡기신 책임이 가볍지 않음을 생각하여, 길이 보전하기를 싫어하지 않으며, 지극히 간절하옵신 교훈을 받들어, 영원히 잊지 않사옵기를 맹세하옵나이다”
(謂主器必有攸歸, 而人心所當預定 遂命庸品, 獲荷崇儀 臣謹當思付托之匪輕, 無斁亦保; 奉訓戒之至切, 永矢不諼, 태종 18년 6월 17일)
세종의 소감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세종이 말하는 ‘임금의 자리는 반드시 돌아갈 곳이 있고 민심은 미리 정한 바가 있다(主器必有攸歸, 人心所當預定)’는 언급이다. 이 말을 곱씹어 보면 왕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던 세종이 얼마나 부단한 자기 노력과 수신 끝에 왕세자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가 전혀 드러내지 않았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국왕이 되려는 큰 야심을 품고 갈고 닦아 왔는지 알 수 있다. 세종은 운 좋게 국왕이 된 게 아니다. 왕자 시절부터 절치부심한 끝에 끝내 3자인 자신에게로 민심의 물줄기를 돌려놓는 데 성공한다.

세종은 왕세자가 되었다는 소식에 그저 기뻐하지만은 않았다. 자신의 책무를 뼈저리게 되새기는 계기로 받아들였다.
“나라의 주기(主器, 주인이 되는 그릇, 즉 왕세자)로서 (저는) 부탁받은 바를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겠습니다!”는 말에서 세종의 국가경영의 무한책임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것이 세종이 재위 32년간 온갖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하루에 잠을 겨우 5~6시간 남짓 자면서 국정에 몰입한 까닭이다.
오늘날 민간이든 국가기관이든 높이 오른 자는 반드시 이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무엇이 된다는 것은 (국민, 구성원으로부터) ‘부탁(付托)’받은 바를 ‘비경(匪輕)’, 즉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얼마나 무거운 소임인가? 하물며 일국의 대통령이 되는 거라면.
지금이 예전과 다른 점은 세종 시대에는 태종과 신료들이 옹립했으나, 지금은 국민이 선출한다는 점이다. 태종과 그 시기 현명하기 이를 데 없는 신료들같이 높은 혜안으로 차기 대통령을 뽑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태종 18년 전후에 양녕이 왕세자 자리에서 왜 쫓겨나게 되었는지 살펴보면서 태종이 말하는 공인의 조건을 알아보았다. 또 시대의 부름에 응하는 세종의 자기 선언에서 국가지도자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절절히 살펴보았다.

지난 5월 12일 광화문 청계광장에서 열린 대통령 후보 출정식에서 이재명 후보는 앞으로 만들어 갈 대한민국을 언급하면서 “한 사람의 지도자에 의해 얼마나 많은 것이 달라지는지 보여드리겠다”고 선언했다. 이 후보가 선조와 정조의 국정운영을 비교한 것처럼 기필코 그가 정조와 같은 시대를 펼치기를 바란다. 나아가 정조 시대보다 더한 광휘로 한국사의 찬란한 미래를 약속한 세종 시대와 같은 미래가 펼쳐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런 세상이 온다면, 이 나라 국민으로서 그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에 있겠는가.
정치는 초지일관 약속을 증명해 내는 것이다. 금석 같은 맹세가 무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지도자는 늘 역사라는 거울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것이 역사가 선사하는 강한 내력이다.
“무릇 잘된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전대(前代)의 치란(治亂)의 사적을 보아야 할 것이요, 그 사적을 보려면 오직 역사의 기록을 상고하여야 할 것이다.” (세종 23년 6월 28일)
이즈음은 어디를 보든 역사의 현장이자, 기록이 아닌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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