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운영의 달인이 되어라]
어느 시대나, 어느 조직에서나 조직 운영의 달인들을 보면, 그들은 하나 같이 현실을 짚어 볼 줄 안다. 조선의 전임 CEO들도 예외가 아니다. 창업을 위해 많은 세력들과 연대하거나 제휴해 그들을 끌어들였다. ‘지금의 문제’를 알고 조직적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국가경영권을 놓고 벌어지는 싸움은 당연히 생사를 거는 문제였다. 따라서 승리하기 위한 ‘힘’은 국가 경영권 창출에 결코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요소였다.
조선은 강한 힘을 얻어 역성혁명에 성공 했으나, 내부에 ‘공신(功臣)’이 넘쳐났다. 그리하여 조직 내부엔 인력 과부하 현상이 생기고, 그러다 보니 실질적으로 일을 할 인재들을 배치할 자리는 많지 않았다. 더구나 공신들을 달래기 위해서는 ‘낙하산 인사’가 필요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신생 조선을 불건전한 재무 상태로 몰고 갔고, 많은 한직을 양산해 냈다. 그 결과 국가 경영상의 누수와 비효율성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따라서 새로운 인재로 정부를 일신하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직책에 대한 ‘다운 사이징(down sizing)’과 ‘라이트 사이징(right sizing)’이 필요했다. 세종이 조직에 메스를 들이댄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임 CEO들이 취했던 방식대로 구세력에 대한 ‘토사구팽적 전략’의 일환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이러한 ‘토사구팽적 전략’의 일환으로 태종은 고육계를 써서 자신의 처남들을 제거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그들의 힘을 누르고, 다른 대항 세력까지 제거할 명분을 확보했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조치라 하겠다.) 그보다는 오히려 바른 인사제도의 실시에 있었다.
[라이트 사이징(right sizing)을 하라]
조선의 인사제도는 세종시대에 순자법(循資法)과 행수법(行守法)이 있었다. ‘순자법’은 경력에 따라 승진시키는 제도로 주로 근속 년ㆍ개월 수에 따라 적용되었다. 즉, 얼마나 근무했느냐에 따라 승진을 시키는 인사 제도였다. 반면, ‘행수법’은 능력에 따른 인사 정책이었다. 실제, 모든 관직에는 그에 따른 직급이 정해져 있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관직에는 그 직급보다 높거나 낮은 사람이 배치될 수도 있었다. 그게 바로 ‘행수법’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직급은 낮은데 높은 관직에 임용되면 그것을 ‘수(守)’라고 했고, 자신의 직급은 높은 데 낮은 데 임명되면 이를 ‘행(行)’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오늘날처럼 대리급이 팀장이 되어 올라가면 그것을 ‘수(守)’라고 불렸던 것이다. 이러한 능력에 근거한 제도는 세종때 처음으로 실시됐다. 그리하여 세종은 경력과 능력에 따른 인사를 골고루 실시해 심층적으로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려는 인사정책을 펼쳤다.
[행(行)과 수(守), 당신은 어디에 해당될까?]
세종시대에는 특히 많은 인재들을 영입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줄곧 실시하였고, 과거에 따른 의례와 시험과목을 정비했다. 한편 가문과 혈통을 중시해 ‘빽’으로 들어오던 ‘음서제(蔭敍制)’를 축소하고 능력을 중시하는 과거제를 확충함으로서 많은 인재들을 배출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은 세종 정부가 인적 자원을 마련하는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인사조치는 세종의 능력주의 원칙에 기반한 것이다. 따라서 창업시대부터 줄곧 이어져 내려 온 조직의 군살빼기는 이러한 능력주의의 인사정책과 맞물려 필수적으로 뒤따랐다. 그리하여 급여를 받던 형식상의 직책이었던 ‘유급산직(有給散職)’은 서서히 그 힘을 잃어 가게 된다.이러한 형식적인 직급들은 여러 이름으로 불렸는데, 예컨대, 영직(影職, 글자 그대로 ‘그림자 직’이라는 뜻. 명목만의 관직을 주고 실제 업무는 맡기지 않는 직책을 말한다.) ㆍ산관직(散官職, 퇴직하더라도 재직시 가지고 있던 품계에 따라 예우를 하던 것을 말한다.)ㆍ노인직(老人職, 7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형식적으로 벼슬을 주던 것을 말한다. )ㆍ무록(실제 사무는 맡기지 않고 이름만 가지게 하는 것으로 관직명 앞에 붙인 말이다.)검교직(無祿檢校職)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것들은 세종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무급산직으로 전환되다가 나중에 저절로 없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세종이 이렇듯 형식뿐인 직책들을 정리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조직의 효율성을 강화해 개혁의 힘을 얻기 위해서였다. 만일, 세종이 이 일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신생 조선을 자신이 지향하던 궤도위에 올려놓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세종은 인사 제도를 통해 현실 경영을 제어하고자 했던 것이다.
[중심 잡은 인사 정책이 인재를 지킨다]
언제나 인사ㆍ조직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도 자체에 있기 보다는 운영상의 형평성에 있다. 세종은 이 부분에서 전문가다운 모습을 뚜렷이 보여준다. 그러나 세종에게 두드러지게 돋보이는 부분은 이러한 원칙 수용과 함께, 상대의 심리를 장악해 나가는 심리적 경영 기법에 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신하들에게 긍정적인 기대를 하고 있다는 점을 주지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은 꼭 드러나는 행위를 통해서만 실행된 것은 아니다. 그의 인사 정책에는 ‘보이지 않는 손’인 상대에 대한 ‘기대’와 ‘바램,’ 그리고 ‘긍정적인 메시지’가 함께 했다.
이러한 CEO의 ‘기대’는 팀원들에게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이자, 업무성과(performance)를 향상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만큼 세종은 그들에게 강한 긍정적 리더십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것이 세종이 국가 경영을 하는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어 주었다.
[인사정책의 핵심은 ‘배려’와 ‘소신’]
이러한 동기 부여의 원칙은 무엇보다도 세종 자신이 세우고 실천한 능력과 성과주의에 근거한다. 또 투명한 인사 제도의 실시에 있다. 세종은 서울 근무자와 지방 근무자간에 승진 시기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를 곧바로 시정해 주는 등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인사 정책의 투명성과 함께 세종이 세운 원칙의 하나는 바로, 다름 아닌 ‘소신 경영’이었다. 그는 소신에 근거한 인사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자신의 중심을 바로 세우고자 했다. 이러한 ‘소신’은 실제 실행 과정에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세종은 이를 일관되게 유지해 나갔다. 반대자는 ‘일’이 진행됨으로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그는 이해했다. CEO가 한번 정한 일을 원칙 없이 자주 바꾸면, 실제 그러한 인사조치에 반발한 측들도 CEO를 낮춰 볼 것은 너무나도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작은 실수보다 큰 공을 높이 평가하라]
예를 들어, 맹사성은 세종이 그의 형 양녕대군을 궁중으로 불러들였을 때 그 불가함을 간하지 않았다 하여 다른 신하들로부터 탄핵된 적이 있다. 그러나 세종은 이러한 탄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맹사성과 황희는 서달(황희의 사위)사건과 관련되어 파직되었으나 채 보름이 되기 전에 다시 그 자리에 복직되었다. 그 뒤 황희는 사헌부의 상소에 의하여 파직되었다가, 세종 13년 9월초에 다시 영의정으로 승진, 발령되었다. 황희의 영의정 임명과 관련되어 빗발치는 항의가 있었으나 세종은 “황희의 일은 모두 애매하여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니 의리로 끊을 수는 없다. 하물며 나라를 다스리는 대신을 어찌 작은 과실로 가볍게 끊을 것이냐.”라는 답변으로 끝까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세종 18년에는 북방수호에 공이 컸던 최윤덕이 변방에서 근무시에 잘못한 일로 탄핵 받았는데, 세종은 이에 대해서도 “군중에서 사소한 실수는 예로부터 있는 법이며, 우리나라 북방에 대한 방어는 오로지 윤덕의 공이다...사소한 실패로 전일의 큰 공을 엄폐할 수 없거늘...다시 더 진언하지 말라”(『세종실록』8년 윤 6월 25일)며 그의 작은 실수보다 큰 공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러한 세종의 조치는 실제 인사 정책의 투명성과 원칙을 지키는 것 이상을 의미했다. 그것은 ‘사람을 끌어안는’ 국가 CEO로서 세종의 ‘진정한 힘’을 보여준 것이기도 했으며, 인재를 아끼고 키우는 세종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그는 실로 인사정책의 목적이 인재육성에 있음을 알고 행동했던 것이다.
[아주 특별한 인재는 발탁승진]
세종의 이러한 인사 원칙은 실제 특별한 인재를 발탁ㆍ승진시키는 경우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세종이 장영실에게 CEO의 기대감을 심어 준 것은, 그에게 피그말리온 효과를 불어 넣기에 충분했다.
신하들의 성과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세종의 이러한 경영 기법에는 세종 자신이 상대에게 보여주는 인간적 관심이 큰 몫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이 자기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를 발휘하게 만드는 원천이 되었다.
조선 초는 지배계급이 자신의 특권을 독점하려는 의지에서 고려 때 보다 한층 두껍게 계급간의 이동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제도를 만들고 있는 시기였다. 따라서 의관(醫官)ㆍ역관(歷官)ㆍ산관(算官) 등 특수 기술직 인재들은 관료의 신분을 유지해도 엄격히 차별되는 중인 신분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 마당에 관노(官奴) 출신인 장영실을 파격적으로 발탁한 것은 지배계급에게 가히 충격적인 인사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참신한 인사는 매너리즘을 극복한다]
세종은 왜 그랬을까?
세종은 훌륭한 인재를 발탁한다는 기본 취지 이외에도 정부 조직 내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고 싶었다. 그런 방식으로 지배 계급 내부에 퍼지는 매너리즘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계급과 계층에서든 이런 조치로 인해 누구든 자기 능력 이상을 발휘하는 자는 스카웃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자극제가 되겠금 하고 싶었다. 그의 이러한 인사 정책은 신분제도 하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치지 못해 숨막혀 하던 인재들에 대해 최소한의 숨통을 열어 놓는 대안의 인사 정책이기도 했다.
장영실은 이처럼 그 자신 탁월한 인재이기도 했지만, 세종이 그를 통해 인사정책의 모범 케이스를 만들어 보이려고 한 기본취지에서 발굴된 인재이기도 했다. 세종은 조선이라는 신생 조직 안에 최상의 생산성과 창조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자 했던 것이다.
장영실의 경우처럼 세종은 한 사람의 기대가 다른 사람의 행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지극히 단순한 인간 심리에 근거한 원리를 통해 학습 분야에서도 경연제도를 강화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