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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세종 | 창조의 CEO

[창조의 CEO 세종] 하나의 성공은 다른 성공을 리드한다

by 전경일 2009. 2. 3.

 

[농업을 백업(back up)하는 기술을 개발하라 ]

세종시대에는 생산성 증대 정책과 더불어, 이를 강화해 주는 각종 개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중국을 통해 들어 온 이슬람의 과학기술은 이집트ㆍ그리이스ㆍ로마 시대로부터 축적된 과학이 그대로 녹아 있는 핵심(core) 기술이었다. - 나일강의 삼각주를 측정하던 수학적 원리와 바로 그런 배경에서 개발된 다양한 기기들을 생각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 이 시기를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조선에 건너 온 이슬람의 과학기술은 결코 그 자체로 적용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고려 때부터 쌓아 온 우리의 자생적인 과학기술과 합쳐졌다. 다시 말해 한국 기술과 외국 기술이 합쳐지는 퓨전, 즉 기술 융합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렇듯 준비된 우리의 R&D 역량 하에 이슬람의 과학기술이 얹어지며 핵심 개발품들은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15세기 우리의 과학기술은 세계 역사에 당당히 부상하게 이른다.

 

 

 

이 시기에는 그야말로 과학기술에 의한 ‘문명의 충돌’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의 과학에 접목되어 세계 모든 과학기술을 녹여 부은 ‘조선식 모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예컨대, 우리가 자주 얘기하는 측우기ㆍ해시계ㆍ물시계 등은 바로 그러한 것들의 예이다. 이것은 하나같이 농업 발달을 위해 만들어진 발명품들이었다.

 

 

 

 

[성공의 릴레이 현상]

 

 

 

세종의 R&D분야에서의 성과는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세종의 이러한 성과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상상력의 승리’ 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 가지 프로젝트의 성과를 다른 프로젝트의 성과로 이어가는데 매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것은 성공의 릴레이 현상 같아 보였다.

 

 

 

그가 그럴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업무를 끝내고 스스로 독서와 사색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깊게 하면서, 국가 경영상의 문제들에 대해 해결의 답안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하는 경영자였고,  깨달음의 순간에 주목했다.

 

그러한 깨달음은 평범한 아이디어로는 승부낼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결론에 이르럿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이라는 ‘바로 그러해야 할 모습’을 만들어 보이기 위해,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얻고, 끊임없이 뛰면서 다시 생각했다. 하나의 프로젝트는 다른 프로젝트들과 연결되면서, 서로를 리드해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다음에 소개되는  몇 가지 프로젝트들이다.

 

 

 

원래,『농사직설(農事直說)』은 농업 자체를 목적으로 해서 기획되고, 쓰여진 책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농업 생산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쓰여진 실용서였다. - 그전까지만 해도 우리 농업은 중국 농업기술서의 내용을 참고하는 수준에 불과했으니, 가히 짐작이 갈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자연 풍토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풍토에 맞는 농법이 필요했고, 그것을 반영해 나온 책이 바로 『농사직설(農事直說)』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농업 분야의 성과가 자연스럽게 의약분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과 신체가 다르지 않다는 신토불이(身土不二)적 생각은 사상의학으로 발전해 우리 고유의 의학서인『향약집성방』이 나오게 된 배경이 되었다. 

 

 

 

또 앞서 소개했듯 새로운 농업기술 - 예컨대, 연작상경, 시비, 간종, 수전 농법 등 - 은 정확하게 파종과 수확의 시기를 알 필요가 있었다. 그에 따라 발전하게 된 것이 바로 천문학과 수리학 분야였다. 우선 정확한 농시(農時)를 알려 줄 수 있기 위해서는 달력과 그에 따른 각종 천문기구가 필요했다. 세종은 우리 스스로 우리 달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중국의 최신 역법(曆法)을 벤치마킹해 우리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게 했다. 또 천체 관측 기구들을 제작해 간의대(簡儀臺)ㆍ규표(圭表) 등을 만들고, 시각 측정 기구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게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세종은 드디어 CEO로 취임 후 26년(1444년)째 되는 해에 본국력(本國曆) - ‘우리나라 달력’이라는 뜻이렸다! - 이라는 별칭이 붙은 우리 고유의 달력인 『칠정산(七政算)』을 완성하게 됐던 것이다. 이 책의 계산법에 따라 천문관들은 1447년 8월에 한반도에서 일식과 월식을 정확하게 미리 맞추었다.

 

 

 

이러한 성공의 릴레이 현상은 수리부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하여 효율적인 물의 활용을 위해 세종은 수차를 도입하고, 측우기를 발명하는 등 활발한 R&D 활동에 정력을 쏟아 부었다. 그 전까지 농사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관개수로를 놓아 경작하는 방식이 아니라, 물이 있는 곳에 드문드문 개간을 해서 씨를 뿌리는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놀고 있는 토지가 무척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물의 양을 재서 농사에 활용한 것은 실로 통계학적인 계산에서 접근한 것이었다.

 

때마침 세자 - 후에 문종이 됨. -는 측우기(測雨器)라는 구리 그릇을 만들어 각 고을에서 비가 오면 빗물이 땅에 스미는 정도를 측정하여 보고하게 했다. 세종은 이 자료를 가지고 농사의 연분(年分) 평가의 데이터로 삼아 농업 정책에 대한 합리성을 꾀하고자 했다. 세자의 강우량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측우기 고안에 그치지 않고 청계천과 한강에 수표(水標)를 세워 비가 왔을 때의 수량을 측정하여 강우의 시기를 통계적으로 파악하기도 했다. 이것은 마치 현대에 들어 장마만 지면 잠수교가 몇 미터 잠겼다느니 하는 식으로 수량을 측정하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 R&D 분야에서의 이러한 연속적인 성공은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여타 국가 경영의 각 부문으로 전파돼 실로 엄청난 파급 효과를 낳으며 세종호는 계속해서 순항해 나아갔다.

 

 

 

 

그렇다면, 세종시대 처음으로 제대로 도입되고, 매뉴얼화 된 농법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경영에 반영할 수 있는 교훈으론 무엇이 있을까?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세종 시대 농법으로부터 배우는 경영지혜]

 

 

 

* 직설(直說): 직접적이고 간결하게 지식을 전달하라. 쉽게 알아듣지 못하는 지식은 현장성을 상실한다.

 

 

* 농시(農時):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는 ‘그 때’를 알아라. 사업의 전개와 공세ㆍ수성의 시기를 잘 알아 이를 행동에 옮겨야 한다.

 

 

 

* 시비(施肥): 거름을 주어라. 당장의 수익에 머물다가는 중기적이고 장기적인 이익을 약속 받지 못한다. 인재를 육성하거나, 사업 기회를 모색하는 것도 다 이와 같아야 한다.

 

 

 

* 수전(水田): 메마른 땅에서는 곡식이 열매를 잘 맺지 못하고, 소출도 적다. 자신의 논밭에 물을 대듯, 자신의 사업영역, 자신이 취하고자 하는 사업 영역에 물을 대어 농토를 기름 지게 하라.

 

 

 

* 연작상경(連作常耕): 계속해서 심고, 거두어들일 수 있도록 사업 토대를 만들어라. 쉼 없이 뿌리고, 거두어들이는 것만큼 강한 사업 기반은 없다.

 

 

 

* 간종(間種): 이랑 사이사이에 다른 작물을 심어라. 현재 하고 있는 사업 영역에서 간과 되는 사업 부문을 찾아내 이를 새로운 사업의 기회로 계속 확장해 나가라. 농두렁에 콩을 심듯, 새로운 영역, 비어있는 영역에의 파종이 큰 결실을 이룬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