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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CEO산에서 경영을 배우다

깊은 산속 샘물

by 전경일 2009. 2. 2.

깊은 산속 일표음(一瓢飮)

 

 

“카아- 시원타!”

지리산 중턱에 올랐을 때 김명득 사장은 표주박으로 샘물을 떠 마시며 생애의 온갖 희로애락이 씻겨나가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고통이 다하면 감로수가 찾아온다고 했던가.


처음엔 빚내서 사업을 시작했지만, 빚을 가리고 나자 돈이 조금 모였다. 손에 돈이 들어오니 다른 사업으로 눈이 돌아갔는데 코가 깨지려고 그랬는지 투자를 하자마자 IMF가 터졌다. 무리다 싶기도 했지만 김 사장은 이 고비만 잘 넘기면 크게 도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왕 들어선 길인 데다 뭐든 크게 생각하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불운은 문을 열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든다고, 사업을 크게 벌인 순간 핵폭탄급 외환위기가 찾아들었다. 가족이 길거리로 나앉았을 때 그는 혀를 깨물었다. 일이 꼬여도 분수가 있지!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지하 단칸방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작심했다.

 

앞으로는 세상이 두 쪽 나도 가족이 먹고살 것은 꼭 떼어놔야지!

 

“큰 사업은 아니어도 샘물처럼 끊임없이 퐁퐁 솟아나는 사업, 제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 샘 같은 내 사업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때 그걸 간절히 바랐죠. 깊은 산속 샘물처럼 말이죠. 뭐든 선샘만 아니면 됩니다.”

 

IMF가 터진 지 10년, 한번 강산이 변하는 틈에 그는 지하 단칸방에서 2층 단독주택의 방 두 칸을 얻어 어둠 속을 탈출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오십견이 찾아왔다. 안 되겠다 싶어서 산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3년이 흘렀고 그에게선 산꾼의 향기가 풍겨 나왔다.

금요일 밤이면 동대문에서 야간버스에 몸을 싣고 전국 도처에 안 가본 산이 없다. 새벽 4시부터 지리산에 오를 때는 “저 깊은 어둠이 언제 가시나” 하고 되뇌며 성큼성큼 걸었다. 그러다 보면 희뿌옇게 새벽이 밝아오며 지하방에 스미던 한줄기 여명처럼 희망이 보였다. 그는 밝게 웃으며 죽지 않고 살아 있었기에 산을 오르는 호사(?)도 누리는 게 아니냐고 했다.

 

이제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듯 조심에 조심을 다하는 게 몸에 뱄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위험, 경영용어로 ‘리스크 관리’에 힘쓰다 보니 마진이 박하긴 해도 두 발 뻗고 잘 수 있어 좋단다.

 

“욕심 부리지 않고 천천히 가는 겁니다. 아직 60대도 아니고 애들도 커가니 요 고비만 넘기면 되죠. 지금처럼 깊은 산속 샘물 같은 사업체 하나면 우리 가족 먹고사는 건 걱정 없습니다. 뭐든 과하지만 않으면 무릎 관절 닳아 없어지기 전까진 산에 오를 수도 있고요. 나중에 산행조차 못하게 되면 배드민턴채 들고 동네 뒷산에 오르면 되고...”

 

김 사장은 표주박으로 샘물을 떠서 다시 한 모금 들이켰다.

 

“요 물이 산삼 썩은 물이요. 한 잔 하시겠소?”

그는 허허허 헛웃음을 날렸다.

 

산에서 만나는 군소사업체 사장은 대개 작게는 자영업에서부터 좀더 나가면 중소기업 혹은 상장회사 오너나 전문경영인이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하나같이 실패와 좌절이라는 인생의 수업료를 지불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혈기왕성할 때는 몰랐던 작은 것의 소중함을 안다. 삶의 경험에서 터득한 그들의 깨달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안분지족’이다.

 

 

산행 중에 만나는 작은 샘물은 1리터의 물통을 채우는 데도 족히 몇 분이 걸리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닥쳐도 마르지 않는다. 김 사장의 말처럼 길게 오래가는 것이다.

 

“떼돈을 버는 것은 내 능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시운도 맞아야 하고 남들이 ‘이 돈은 네가 먹어라’ 하고 주어야 합니다. 운칠기삼이 아닌 운구기일인 거죠.”

그는 살면서 갈증이 날 때는 강물처럼 넘치는 물이 아니라 목을 축일만 한 약간의 물이 필요할 뿐이라고 지론을 펼쳤다.

 

“강물을 다 마시면 죽게 되어 있지만 요런 샘물을 먹고 죽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지요? 인생 후반으로 갈수록 철썩거리는 소리보다 졸졸거리는 소리가 더 가까이 들려야 합니다. 그게 내가 먹을 물이죠. 요 맛 때문에 나는 산행을 다닙니다.”

 

모든 경영자가 김 사장과 동일한 목적으로 산행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가 터득한 인생의 진리랄까, 살아가는 묘미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산행의 묘미라! 깊은 산속 옹달샘은 토끼가 와서 먹는 게 아니라 분명 새벽 산꾼이 먼저 맛보고 가는 게 틀림없다. 아마도 그들은 좀더 오래 인생과 산행을 음미하며 살아갈 것이다.

ⓒ전경일. <CEO 산에서 경영을 배우다>(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