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사람 복’ 많은 CEO
세종은 정말 ‘사람 복’도 많은 CEO였다. 하지만 세종시대 인재는 결코 거저 얻어진 게 아니었다. 인재를 알아보는 CEO의 눈이 있어야 했고, CEO의 관심과 이를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육성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했다. 세종은 이것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 음악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게 된다. 세종은 정말 뛰어난 음악적 소양과 전문 지식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가 음악 정비를 직접 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음악적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음률을 조금은 이해하므로 제사 때를 당하여 들으면 웃을만한 일이 많다.”(세종실록』 27년 6월 경신) 라거나, “나도 음률을 제법 아는데 지금 연향 할 때에 남악(男樂)이 음률에 맞지 않는 것이 많다.”(『세종실록』 25년 4월 임인)라면서, 그 자신 ‘음악을 좀 아는 사람’으로 스스로 자처했다.
세종의 ‘우리 음악 만들기’ 프로젝트
그는 또 음악 이론과 이전의 전례들에 대해서도 풍부하게 알고 있었다. 세종은 ‘우리 음악 만들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TFT 요원들보다 오히려 음악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다.(『세종실록』 12년 9월 정묘) 또 외국 음악 이론에도 박식했다. 중국의 음악이론서인 『율려신서』연구에도 정통했다.
음악에 대한 이해는 실로 격조 높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추구한 문화 강국의 위상은 훗날 서서히 우리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리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물론, 그 시기 세종의 주요 관심사는 궁중 음악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빼 놓을 수 없는 주요한 문화유산이 된다.
그는 실로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보면서 동시에 현재를 설계하고, 밀고 나간 경영자였다. 그것은 풍부한 음악지식과 우리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왔다. 또 고전을 참고 하되, 시정(施政)에 맞게 활용하는 적극적인 현실성과 균형감 있는 음악정책 등을 통해 완성되고 활용 되었다. 그것은 ‘우리 음악 만들기’의 연장선상에 얻어 낸 세종의 값진 경영 철학이자, 유산이었다.
세종은 댄스 지도사, 패션 디자이너?
세종 14년 3월에 세종은 의례상정소의 제조를 불러 놓고, 춤과 복장에 대해 자기 소견을 밝힌다. 그는 문ㆍ무무(文ㆍ武舞) 관복의 제도와 춤 출 때 나아가고 물러가고 변화를 짓는 절차 -‘율동 순서’ 또는 ‘스텝’이라고 할 수 있는 - 가 옛 제도에 어긋나게 되면 반드시 후세의 웃음거리가 될 것을 크게 염려해 본격적인 음악 감독에 나선다.
또 무동의 관복과 의물의 작업을 하나하나 감수하여, ‘훗날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세종실록』14년 3월 정해, 14년 5월 기미) 이와 같은 노력으로 세종 15년 정월 근정전에서 회례연을 거행하였는데 그 장면은 세종이 흡족히 여길 만큼 장관을 이루었다. 이 일을 두고 세종 13년 정월 병인일의 기록에는 “처음으로 새로 제정한 아악을 사용하니, 그 의용과 법도와 성악이 선명하고 위의 있어 볼 만 했다.”(『세종실록』13년 정월 병인)고 적고 있으며, 세종도 “경건하고 씩씩하고 기뻐하고 즐거워 했다.”고 한다.
미심쩍으면 철저하게 검수하고 검증하라
세종은 또 율관의 제작은 물론, 악기ㆍ관복ㆍ의물의 제작과정을 직접 검수하는 과정을 통해 결재했고, 의례상정소와 예조의 전문가 그룹에게 맡겨 신중한 검증 과정을 가졌으며, 때로는 중국에 현지 출장을 보내 이를 확인하도록 했다. 이런 검수ㆍ검증 과정에 CEO가 직접 참여 하였다. 그리고 회례악무(會禮樂舞)를 제작할 때에는 무동의 춤추는 절차와 무동 및 악원들의 관복 제정에 대해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고증에 집착하기도 했다. 심지어 악공들의 관복을 그림으로 그리고 모형을 만들어 오라고 지시까지 했다.
세종은 권제 등이 지어 올린『용비어천가』를 음악과 춤으로 표현하기 위해 예전에 중국에 체류한 적이 있던 창가비(唱歌卑) - 지금으로 말하면 합창단 - 을 불러 당악에 맞추어 노래하여 보게 하거나,『용비어천가』를 가사 없이 관현악만으로 연주 하게 하여 보는 등 온갖 실험을 거듭했다. 이런 노력 끝에 「정대업」「보태평」이라는 일종의 의례용 댄스곡은 작곡되었던 것이다.
세종은 새로운 음악 창제에 대해 이처럼 매우 세심하게 검토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새로운 음악은 마침내 세조 6년에 이르러 “지금부터 정대업ㆍ보태평ㆍ발상ㆍ봉래의의 신악을 익히고 구악을 다 폐지하라.”는 단호한 명령을 내리게 만든다. 이로써 「정대업」과「보태평」은 종묘제례악으로 영구히 남게 되었던 것이다.
디자인 경쟁력을 키우라
세종시대에 만들어진 과학기기, 청동활자, 서적들, 그리고 백자와 분청사기 같은 것들은 실로 우리 디자인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그것들의 미적(美的) 기반은 누구나 쉽게 매료된다. 그것은 하나같이 그윽하며,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그 정취에 한없이 빨려 들어가게 만든다. 그것들은 결코 샛되지 않다. 다시 말해, 기품이 있다. 이러한 미적 특징은 당시 중국의 것과 확연히 구별된다.
이러한 우리 디자인의 특징은 세종이 직접 주도한 과학과 IT기술 관련 발명품들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하여 경복궁 대간의대는 아담한 멋을 내는 돌로 쌓은 관측대의 모습이고, 거기에 설치한 해시계들은 그 기능과 함께 독특한 디자인이 돋보인다. 그 정교한 만듬새와 우아한 모양은 그것이 IT 개발품인지 금속 공예 작품인지 혼동이 갈 정도다. 또, 책의 인쇄와 제본도 매우 품위 있고, 아름다운 장정으로 되어 있다. 이를테면, 책의 장정은 책에 5개의 구멍을 뚫어 끈을 꼬아 꿰매고, 몇 겹의 닥종이에 은은하게 무늬를 입힌 표지로 되어 있다. 세종 시대 디자인은 이처럼 매우 단아하면사도 실용적인 미학을 추구한 것이었다.
시대적 분위기가 명품을 만든다
이러한 ‘멋’과 ‘운치’는 그 시대 장인(匠人)들이 문화 예술에 대해 깊은 조예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또 당대의 경제적 풍요와 지적 호기심, 그리고 다양한 실험 정신과 창작 혼을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분위기가 없었다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세종시대의 디자인이 품격 높았던 이유는 경제적 여유와 함께 정신적 풍요, 그리고 이를 밑받침하는 국가적인 창조적 분위기가 그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사실 어느 조직이나 그 ‘문화’와 ‘분위기’는 지도자의 모습을 많이 닮은 데가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의 CEO가 미치는 개인적 취향과 인품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세종시대 이러한 품격 높은 디자인에는 그 시대를 이끌어 나간 CEO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세종의 ‘체취’인 것이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