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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경영/남자, 마흔 살의 우정

[남자 마흔 살의 우정] 친구는 서울로 갔었네

친구는 서울로 갔었네


시골 작은 역에 기차가 도착했다. 이십 년 전 고향을 떠난 친구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가슴 설레이며 마중 나가는 중이었다. 그 친구는 오래 전 도시로 나가 꽤나 근면하게 일해 돈도 모으고, 결혼도 하고, 탐스러운 과일 같은 아이들도 주렁주렁 낳았다. 누가 보기에도 그 정도면 성공한 인생이었다.


열차가 멈추어 서자 웬 중년의 사내가 내려섰다. 나는 첫눈에 그 남자가 열다섯 살 때의 친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달라진 거라고는 그 시절 곰배무늬 바지 대신 양복을 입고 외투를 걸쳤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다가가 반가운 마음에 덥석 그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힘을 주어  손을 잡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막상 친구는 내 요란벅적한 환영 인사에도 불구하고 선뜻 손을 펴 악수하기조차 주저하고 있었다. 나는 멋쩍은 분위기를 만회하고자 다소 크게 말했다.


“여보게! 악수나 한번 함세.”

그러자 그가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손을 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주춤한 이유를 직감적으로 알았다. 친구의 손은 손가락 세 개가 사라져 있었다.


"사고나 났었네. 전기톱이 훑고 지나갔지. 십 년도 넘게 지났어."

그렇게 말하는 친구의 표정에는 문득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상경한 뒤 어느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손가락을 잃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그 점이 부끄러워 악수하기를 주저했던 것이다.


"뭘 그러나? 그럴 수도 있지. 그만하니 다행이네. 자네는 이 고장에서 몇 안 되는 성공한 친구 아닌가."

나는 그를 근처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걸어가는 길에 이번에는 그가 약간 다리를 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말했다.


"예전에 교통사고까지 나지 않았겠나? 서울이라는 데가 그렇더군……."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자리에 앉아 내 술잔을 받았다.


"그래, 다들 무고하시고?"

"애들이나 마누라나 다 잘 있네. 큰 애는 대학엘 갔지. 기숙사에 있어서 요즘엔 찾아오지도 않는다네. 제 에미 죽은 후로는……."

"그렇게 됐군……."

그는 품에서 꺼낸 사진 한 장을 내게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한 동남아 계통의 혼혈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내가 얘기했었던가? 나 재혼했다고? 전처는 몇 해 전 죽었지. 큰 애는 그래서인지 학교 간 뒤로는 찾아오지도 않는다네. 내 재혼이 못 마땅했던 거지. 어디 이 나이에 한국 여자랑 언감생심 결혼할 생각이나 할 수 있겠나?"

친구는 어느새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없이 사는 게 서러워서 서울로 갔고, 열심히 일해서 재산도 조금 모았는데, 이상하지. 살면 살수록 계속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이네. 뭔가가 나한테서 자꾸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야. 자네를 찾아 온 것도, 죽기 전에 천진무구했던 시절로 한번 돌아가 보고 싶어서였네."


우리는 어색한 분위기를 감추려고 잠시 옛 시절로 되돌아가 개울가에서 물장구치던 일, 수박 서리에 된통 혼쭐 빠져 달아나던 일을 꺼내며 박장대소 했다.


“사는 게 다 허접스럽네. 사실 나 말일세, 여기 온 이유가 따로 있네. 나, 아무래도 오래 못 살 것 같네. 암이라고 하더군……. 억울한 거 있지? 이렇게 악착같이 살았는데 암이라니……. 나 죽으면 이 젊은 마누라하고 철모르는 애한테 죄 짓는 것 같아서 미안할 뿐이네. 이를 어쩌면 좋겠나?"


친구의 얘기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무슨 일을 해서든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사람아. 왜 이렇게 나약하게 구나? 병이야 고치면 되지. 자네나 나나 아직 젊지 않나?"


짐짓 그렇게 말은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아무래도 그가 마지막 인사를 하러 나를 찾아 왔다는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순간에는 뭐라고 대꾸해줘야 할지 어떤 위로의 말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꼬박 그렇게 밤을 새워 얘기를 했다. 새벽 무렵이 되었을 때, 나는 친구의 손을 이끌었다. 그러자 그는 왕복 열차표를 끊고 왔다며 극구 사양했다. 그는 나를 만나는 것 외에 더 이상 볼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열차가 희뿌염한 안개를 뚫고 사라질 때, 나는 그와의 만남을 다시 떠올렸다.


그렇구나. 누구나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구나. 저렇게 정리하고 싶어지는 거로구나…….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식당에서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나는 그의 가방을 열고 얼마간의 여비와 메모 한 장을 집어넣었었다. 그는 그것들을 서울에 도착할 쯤이면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름에 쏘가리 잡아 놓고 연락하겠네. 몸보신하러 냉큼 내려오게나."


어쩌면 그가 영영 내려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그 생각을 떨쳐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가 단 하나만은 놓치 않기를 바랬다. 설령 천국에 먼저 가는 일이 벌어질지라도 오래 묵은 장 맛 같은 이 친구를 잊지는 말라고 말이다. 그리고 누가 먼저 찾든,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그해 여름이 끝날 때까지 그 친구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가을쯤, 그의 부고를 받았다. 

ⓒ전경일, <남자, 마흔 살의 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