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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조선의 왕들

[태종]복잡계의 리더십: 노회함과 정직에 대해

by 전경일 2009. 2. 27.

정치 9단. 음모와 술수의 대가. 쿠테타의 주역. 철저한 냉혈한이자, 무(武)의 제왕...

조선 제3대 임금, 태종 이방원에 대한 이 같은 비유는 결코 틀린 얘기가 아닐 것이다. 나아가 그를 변혁 시대가 만들어 낸 풍운아이자, 불나방 같은 혁명가라면, 이 말 또한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비록 역사에 나타나는 권력이라는 게,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면 말이다. 


태조 이방원. 과연 그 같은 사람을 우리는 리더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에게도 과연 리더십이라는 게 있었는가? 있다면 어떤 점에서 우리는 그의 리더십을 찾아내고, 현재에 맞게 재해석해 낼 수 있을까? 역사를 다룸에 있어 이런 인물에 대한 의미부여가 혹, 현대사를 어둡게 드리운 군사 쿠테타와 연이은 독재를 정당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이 같은 의문을 품고 우선 태종이 누구인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만일 한 시대의 리더로써 태종을 정의하라면, 그는 너무 ‘복잡한 인물’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너무 복잡해 조선 창업시 온갖 논리와 명분마저 집어 던지고 가장 걸림돌이었던 정몽주를 직접 선죽교까지 쫓아가 죽임으로서 복잡하기만 한 정국을 일시에 국면 전환시킨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태종은 무(武)의 제왕이기도 하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이 고려말(우왕 8년 1382년) 문과에 급제한 수재로 역대 국왕 가운데 가장 뛰어난 유학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만일 이같은 사실을 안다면 태종이란 인물은 한층 더 미궁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과연 그가 누구인지 말이다.


오히려 2차례 왕자의 난을 겪으며 형제를 권력 투쟁에의 희생양으로 삼고, 나아가 자신의 처남 모두를 죽였으며, 그것도 모자라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는 외척의 발호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사돈까지 죽여 없앤 제왕이라면, 이는 오히려 그에 대한 명징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태종에 대해서라면, 그게 다가 아니다.

현대 리더십과 연결해 그를 보면, 그는 리더를 만들어 내는 순리의 권력과 함께 한 사람이 아니라, ‘역리(逆理)’에 의해 권력을 만들어낸 리더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만큼 태종에 대한 해석은 태종이란 인물만큼이나 복잡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에 나타난 그의 활동상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태종은 고려말 태조 이성계가 신흥세력으로 부상할 때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며 역사에 부상한다. 부친을 도와 권력을 만드는데 동참한 쿠테타의 동지였으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미래의 권력과 코웍(co-work)하는 안목을 갖추기도 했다. 그의 리더십은 비인간적 요소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동시에 그의 행적엔 피 비린내가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권력이란 어느 시기에나 비정(非情)한 것 아닌가! 변혁의 시기에, 사상적으로도 부유(浮游)하던 려말-선초의 전환기에, 철저한 야심가였던 그는 새로운 사상으로 우리 역사에 전면 등장하는 유학을 받아들여, 새로운 질서의 사상적 기초를 삼을 만큼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을 했으며, 그 자신도 사상적으로도 새롭게 재무장을 한다.

그가 성리학의 대가인 민제의 사위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1,2차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는 권력 앞에선 형제간의 피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형제들은 그의 권력을 치장하기 위해 마땅히 피를 내놓아야 했다. 나아가 권력을 잡은 후에는 부친을 도와 혁명의 대열에 뛰어들었던 개국 공신들을 토사구팽하고 500년 조선의 경영권을 확실히 다져 놓았다. 고려의 충신들을 무덤속에서 불러내 충신으로 추승함으로써 죽은 자를 한번 더 죽였고, 산자를 치욕 속에서 죽게 만들었다. 이것이 태종의 진면목이다.

 

그는 그랬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썩어가는 고려의 무능을 뒤엎고 진정으로 새 시대를 연 사람 아닌가? 시대를 앞선 강력한 리더십으로 쿠테타의 주역들을 묶어내고, 나아가 사상적 대안을 제시한 선지자 아닌가 말이다. 게다가 공신이란 이름으로 권력에 맛들임으로써 진정한 정권 교체의 의미를 퇴색케 한 신층 기득권층과 맞서 다시 개혁에 성공한 영원한 혁명가 아닌가 말이다. 창업 동지들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역사라는 이름 위에 사적(私的) 관계가 서지 못하도록 이를 극복함으로써 역사의 엄중함을 구현한 사람 아닌가 말이다.

 

이것 뿐인가? 또 그가 한 정치는 어떠했는가? 집권하면서는 과감한 개혁으로 고려의 때를 씻어내고 새로운 역사를 열어나가려 하지 않았는가? 고려 500년이 권력 분산으로 한번도 중앙집권을 이뤄내지 못한 사실(史實)을 반면교사 삼아 조선을 국왕 중심의 국가가 되도록 하지 않았는가? 왕을 정점으로 한 의정부, 육조체제의 정립과 후대에 <<경국대전>>에 법제화의 행정적 토대를 만든 인프라 혁신의 리더가 아닌가 말이다. 더구나 민의를 염두에 두고 설치한 신문고는 어떠한가.

 

“내 부덕한 사람으로 대통을 이어받았으니, 밤낮으로 두려워하면서 태평에 이르기를 기약하여 쉴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이목이 샅샅이 미치지 못하여 옹폐(壅蔽)의 환(患)에 이르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이제 옛 법을 상고하여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한다. 온갖 정치의 득실과 민생의 휴척(休戚)을 아뢰고자 하는 자는...즉시 와서 북을 치라...”(<<태종실록>>1년 8월 1일)

 

이것을 군주에 대한 반역행위를 고발하도록 만든 창구라는 식으로만 보기에는 너무 미진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왕위에 오르며 성왕(聖王)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한 것은 무엇인가?

 

“아아! 천지의 덕은 만물을 생성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임금 된 자의 덕은 백성을 은혜롭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늘과 인민의 두 사이에 위치하여 굽어보고 우러러보아 부끄러움이 없고자 하면 이르건대 공경하고 이르건대 어질게 하면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에게 부지런히 하는 것이다. 힘써 이 도리에 다라서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겠다.”(<<정종실록>> 2년 11월 계유)

 

이럴 때의 태종의 모습은 유교적 사상으로 무장한 리더의 결연한 결의가 엿보이지 않는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가(王家)의 외척들을 정리할 때 교묘하게 여러 신하들을 통해 사건을 만든 그 특유의 술수는 다 무엇인가?

 

[상소를 받고] 태종은 말하기를, “대간(臺諫)의 직임은 진실로 옳다. 외척과 대신을 탄핵하여 기강을 진작시키는 것은 과인이 즐겁게 듣는다.”(<<태종실록>>7년 6월 을미)

 

무고한 피를 부른 정치 9단의 음모와 술수 이외에 여기서 어떤 리더십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런 까닭에 태종의 리더십은 매우 복잡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태조보다 창업에 오히려 더 큰 공을 세운 태종. 그는 이처럼 모순된 사람이기에 복선과 행간의 의미를 읽게 하는 복잡계의 리더십을 보여준 몇 안되는 조선의 국왕이다. 더구나 그 자신, 위기를 극복해 내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새로운 정치 국면을 만들어 냈고, 리스크를 감내해 내는 모험으로 창업에 일익을 담당했기에 말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신진사대부들에게 사상적, 정치적 리더십으로 새로운 정치를 실현해 보여 주었으므로.

설령 그의 복잡계의 리더십이 남과 다르거나, 다른 방식을 취한다 하여 그의 리더십을 폄하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시대는 어떤 식으로는 움직이는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였기에, 그가 보여준 다른 형태의 리더십을 통해 우리는 다른 모습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리더들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