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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CEO산에서 경영을 배우다

그대, 진산을 오르고 있는가

by 전경일 2009. 9. 22.

마음의 산을 진정으로 갈고 닦아라. 산이 대답할 것이다.

“D그룹은 내가 15년간 몸 바쳐 일한 회사였지. 당시에 세계경영을 부르짖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자부심이 넘쳤겠어. 헌데 총수 한 사람이 전횡을 일삼다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 내가 쌓은 산이 진산(眞山)이 아니라, 허산(虛山)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지.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니까 순식간이더군. 하루아침에 내 청춘을 송두리째 바친 경력도 날아가고 어디 가서 그 회사 얘기를 해봐야 돌아오는 건 뻔했어. 망한 회사라는 이미지가 꽉 들어박혔으니까. 회사가 망하면서 내 모든 걸 잃어버린 거야. 그때 인생의 목표를 다시 잡았어. 어차피 취직이 안 된다면 내 산을 올리자고 말이야. 자그마한 동산이라도 좋으니 내 산을 만들자고 생각했어. 그렇게 해서 지금의 회사를 창업한 거야. 처음부터 난 원칙을 세웠어. 앞동산, 뒷동산이어도 좋으니 내실 있게 하자. 사업을 접으면 접었지 차입은 금물이라는 것이 내 원칙이었어. 내 젊음, 내 사회생활, 내 경력과 함께 무너진 경영행태를 반면교사로 삼은 거지.”

산행 중에 휴게소에서 점심을 끓여먹으며 남윤기 사장은 회한이 묻어나는 좌절과 희망을 들려주었다. 주말을 낀 연휴라 그런지 백두대간의 꼭두인 강원도 산에도 사람들이 적잖게 모여들었다. 코펠이 달각달각 끓어오를 때 나는 라면을 넣었다. 돼지고기를 듬뿍 넣어 끓인 그의 김치찌개를 보니 소주 한 잔이 그리웠지만 산행 중의 음주는 금물이다.

“한동안 술에 절어 지냈지. 되는 게 있어야 말이지. D그룹에서 명퇴금 얼마나 받고 나왔냐, 우리 하청업체라도 소개해줄까, 이 어려운 시기에 참 걱정이다, 뭐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냐... 친구들의 이런 말이 왜 그렇게 성가시고 짜증스럽던지. 사실은 다들 누구 처지를 고민해줄 주변머리도 못 되는 입장이었거든. 술을 마시며 한 1년을 보냈나? 퍼뜩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때가 마흔다섯 살이었어. 답답한 마음에 이전 직장 사람 중에 산에 오르는 동료와 막걸리를 사들고 북한산에 올랐지. 처음에는 갈 데도 없고 답답해서 올랐는데 거기서부터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 거야. 산에만 올라가면 이상하게도 빨리 내려가서 뭔가 내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마구 밀려들더라고. 다급해지기도 하고. 그런 이상한 설렘, 흥분을 느끼며 내려오면 이놈의 세상은 또 다시 막막하기만 했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간신히 지금의 사업거리를 잡았어.”

남 사장은 산과 그 아래를 배회하다 자신이 해온 일이 곧 산이고, 사람이 산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 산을 헤치며 다니다 오퍼상이라는 사업 아이템을 잡았다. 그는 이전 회사의 인맥을 최대한 활용해 홍콩 바이어를 물색했고 거기서부터 조금씩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종자돈이 마련되자 조그마한 부품 공장을 하나 인수했다. 말이 좋아 부품 공장이지 가내수공업체나 다름없다. 착실히 내실을 다지면서 납품원가를 낮추는 전략으로 회사는 단단히 여물어갔다. 당초의 결심대로 작지만 튼실한 그의 공장은 부채가 전혀 없다.

“내가 직장생활과 사업에서 배운 것은 진산을 쌓아야 한다는 거야. 아무리 작아도 사업체는 탄탄하게 운영해야 하고 진심을 다해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자세로 산을 쌓아야 하지. 나는 사업을 키워 대기업이 되는 것은 바라지도 않아. 바란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자기 능력은 생각지도 않고 허욕에 들떠 있지. 속빈 강정 같은 회사는 사장뿐 아니라 직원들에게도 죄악이야. 물론 외형과 확장도 중요하지만 나는 언제나 부채비율을 제로(0)로 유지하려고 해. 자칫하다간 공든 탑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가까이에서 봤기 때문에 내가 이 원칙을 버리는 일은 앞으로 사업을 하는 한 절대로 없을 거야. 남의 돈은 정말 무서운 거야. 그때 온 나라가 그 정도 겪었으면 됐지 또 그럴 수는 없는 거잖아.”

그는 최근의 기업 행태를 날카롭게 꼬집었다. 여전히 기업들이 확장 중심이고 차입 경영의 무서움을 모르며 외형만 늘려 가면 그룹이 되는 줄 안다며 질책이다. 나아가 오너 일가의 전횡이 예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며 개탄했다.



그는 진산을 위해 오늘도 산행에 나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에 오르면 과거의 자신이 비춰지고 밥술께나 먹게 된 지금에 감사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산에 오르기 위해 집을 나설 때마다 만나게 되는 걸인들 앞에서 언제나 발걸음을 멈춘다.

“사람 팔자 한순간이지. 그 사람들을 보며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게 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야. 마음이 부자라야 진심으로 산을 오르고, 올리지.”

그와 나는 배낭을 챙겨 어느새 고갯마루를 향하고 있었다. 오늘밤에 달이 휘영청 떠오르고 달 빠진 술잔을 털어 삼키면 그가 그간 묵혀온 이야기보따리를 죄다 풀어낼 것만 같았다.

허산(虛山)은 위산(僞山)이요, 진산(眞山)은 실산(實山)이라!

마음속에서 진산 얘기가 계속 맴돌았다.
ⓒ전경일, <CEO 산에서 경영을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