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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통섭과 초영역인재

창조경영 시대의 도래(2)

by 전경일 2009. 10. 21.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보면, 세종이 윤사웅, 최천구, 장영실과 더불어 혼천의 제작시, “중국의 각종 천문 기기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어라.”라고 한 대목이 나온다. 이는 모방을 창조의 프로토 타입(proto type) 으로 보고 접근한 케이스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이들 천문기기 제작 3인방은 1년여(1421년(세종 3년)~1422년(세종4년) 사이)에 걸쳐 중국에 파견되어 철저히 벤치마킹 하였고 간의 제작에 관한 창조적 아이디어를 구체화시켜 귀국하게 된다. 기술적 연구자로 정인지, 정초가, 제작 감독으로 이천, 장영실이 10년 동안 노력한 끝에 마침내 시험제작에 성공하자 본격적으로 대규모 천문대인 <대간의대(大簡儀臺)> 설립 사업은 진행되게 된다.

기회 발굴과 창조적 경영정신, 그리고 조직적인 공동연구와 협업의 노력이 모여 그 시대 가장 빛나는 탁월함의 경영을 이뤄낸 것이다. 동시대 창조적 인재들(즉, 집현전과 같은 창조집단)에 대한 세종의 각별한 관심은 한 시대의 창조의 수준을 급격히 향상시켰다. 세종이 장영실을 가리켜 “나와 함께 동시대에 태어난 것은 하늘이 나를 도와준 것.”으로 자평한 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세종의 창조적 인재들에 대한 일방적 감사의 표현이 아닌, 그 시대 창조적 집단이 세종에 대해 가졌던 권위와 찬사로 나타난다. 세종시대의 인재들,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이천, 장영실, 윤사웅, 권제, 안지, 변계량 등 수많은 인재들은 세종과 더불어 창조성을 드높인 시대에 대해 같은 자부심을 느꼈고, 세종에게 창조의 영광을 헌정했다. 특히《훈민정음 해례본》에 정인지가 남긴 기록은 창조적 임금에 대한 가장 경건한 헌사로 볼 수 있다.

“이 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셨는데, 그 글자는 고전(古篆)과 비슷하고, 초성ㆍ중성ㆍ종성으로 나누어지는데, 이것이 합쳐진 이후에 문자가 된다. 무릇 한자 및 우리나라 말을 모두 가히 쓸 수 있다. 비록 문자가 간단하지만, 그 전환이 무궁무진하다. 이를훈민정음이라 한다.”

세종시대 성숙된 창조적 여건은 문자창제뿐만 아니라, 사회 전 분야의 생산성 향상에 크게 이바지해 특히 벼농사의 경우에는 고려 초 에 1결(結, 세금을 매기기 위한 논밭의 면적 단위로 백 짐 또는 만 파(把)를 가리키는 말.)의 경작지에서 평균 6~11석이 생산되던 것이 1430년 하삼도(下三道, 전라, 경상, 충청 3도를 말함.)에서는 20~30석, 50~60석으로 약 300~600%로 생산성이 늘어난다. 또 고려 초에는 씨 뿌린 것의 약 3배 정도 밖에 거두지 못했지만, 세종시대에 이르러서는 씨 뿌린 것의 40배의 생산성 향상을 가져온다. 오늘날 그 어떤 생산성 향상 운동보다도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결과를 도출해 낸 것이다. 농업에서의 혁명은 문화적인 풍요와 더불어 그 시대의 철학적 깊이를 심화시켰다. ‘중국과 다르다’는 자아인식과 차별성은 독자적 농법, 문자, 역법, 국가경영상의 새로운 철학적 담론을 가져왔다. 이 같은 전 분야의 혁신과 창조적 풍토는 경제안정과 더불어 문화강국이 되는 선순환적 구조를 만들어 내며 세종 시기를 르네상스기로 격상시킨다.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인지와 기회포착의 창조성이 성장과 분배의 씨앗이 되어 명실상부한 대풍평(大豊平)의 세상을 열어젖힌 것이다.

세종시대가 창조의 원천이었다면, 르네상스를 열어젖힌 이탈리아에서는 어땠을까? 《르네상스(Great Ages of Man)》의 저자인 존 R. 헤일은 창조가 발현되는 시기는 어느 나라나 조건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밑받침 해 준다. 그것은 인재가 ‘샘이 깊은 물’처럼 마르지 않고 솟아 난다는 점이다. ‘암흑시대’라는 말은 처음 사용한 사람은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인이었다. 그들은 로마가 만족(蠻族)의 침략을 받은 시대를 조잡한 장막에 가려진 시대라고 평했다. 그것이 이어져 온 10세기를 잠자던 시대라고 불렀다. 그러기에 일단 내려진 장막을 걷어 올리고 위대한 로마의 문학, 유적, 그 밖의 갖가지 가치 있는 것에 다시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이 그들의 기쁨이며,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라고 여겼다.

“이탈리아인은 모든 학예 분야에 걸쳐 구름처럼 나타난 천재들의 힘과 함께 자신을 가지고 일에 임했다. 그들 천재들의 이름을 잠깐만 들어보아도 시인이나 학자로는 페트라르카, 복카치오(Boccaccio, Giovanni), 조각가로는 도나텔로(Donatello), 건축가로는 브루넬래스코(Brunellesco), 화가로는 마삿치오(Masaccio) 등을 들 수 있다. 15세기 중엽 맛테오 팔미에리(Matteo Palmieri)는 진정한 기쁨에서 ‘희망과 앞날이 빛나고 과거 1000년 이래 미증유의 재능 많은 사람들이 즐비한 이 새 시대에 태어났음을 신에게 감사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창조시대의 주역이 창조적 인재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세종시대의 찬란한 창조가 자랑이라면, 이탈리아에서는 도시국가의 창조성이 당시의 세계를 이끌었다. 알다시피 “르네상스는 양보다 질의 시대인 게 특징이다. 따라서 그 시대에 가장 적합한 국가형태는 두뇌집단이라 해도 좋은 도시국가였다.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우수한 조직도 성공을 바랄 수 없다.” 그들은 암흑의 중세를 부수는 시대의 흐름을 꿰뚫었고, 거기서 무한한 창조적 역량을 드러냈다. 조선의 세종시대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연 천재들의 시대 - 그들은 시대와 지리적 간극을 뛰어 넘어 어떻게 각자 창조적 기풍을 드러낼 수 있었을까?

그 시대 담론인 창조성은 오랜 역사와 타문화에서도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있기에 꽃필 수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교도의 유물이라도 배울 가치가 있으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고대 로마의 유물이 다시금 조명을 받게 되었다. 세종의 조선도 개방과 기회를 근간으로 이슬람의 유산을 바짝 마른 대지가 비를 빨아들이듯 받아들였다. 양 시대, 양 국가가 모두 과거와 주변을 ‘배우고 익히는(學而時習)’ 방식으로 창발성의 꽃을 피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배움이 전제되지 않는 기업과 국가는 미증유의 도약을 이뤄낼 수 없다는 얘기와도 같다.

창발성은 문화를 이끌어 나가는 것만이 아닌, 경쟁의 패러다임을 바꿔 리딩 국가나 기업을 한 발 더 리드해 나간다는 면에서 그 파급력이 가히 폭발적이다. 한 시대의 발전 과정상 어느 일정한 시기의 교착상태는 새로운 인재형을 요구한다. 오늘날 한국 기업이 처한 환경이 이와 같다. 새롭게 다듬어진 창조적 사람들을 통해 기업은 활로를 찾아야 하고, 선도경영의 국면을 맞이해야 한다. 경쟁력이란, 내부 가치에 주목하고, 이를 통해 다양한 실천적 실험을 하는 가운데 얻어진다. 21세기의 생존법인 창조를 우리가 늘 껴안고 살아야할 이유는 무엇보다 명확하다. 새로움으로 낡음을 물리치고, 새로운 앞선 경영지평을 열어젖히려는 것이다. 창조는 변혁시대의 가장 뚜렷한 진정성을 담보한 가치이다. 어떤가? 이 시대에 동참하고프지 않은가? ⓒ전경일, <초영역 인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