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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

광개토태왕, 시대의 부름에 응하다

by 전경일 2010. 4. 20.

태왕이 등극한 시기는 오늘날 분단으로 인해 국운 융성이 가로막혀 있는 한반도가 처해 있는 여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기였다. 선대왕인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국가체제를 크게 개혁하기는 했지만, 민심은 여전히 분열되어 있었다. 또한 중국의 5호 16국 시대라는 말이 웅변하듯 국내외 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 같은 상황에서 태왕은 18세 소년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나아가 그는 재위 20여년 만에 광대한 대제국을 이룩해 낸다. 그는 어떻게 이 같은 엄청난 위업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태왕의 왕위 계승은 역사적 필연성을 갖춘 드라마틱한 과정이었다. 부친인 고국양왕은 원래 소수림왕에 이어 왕위를 계승하기 전에는 그저 왕제(王弟)로서 군중(軍中)의 한 장수에 불과했다. 그런 이유로 고국양왕의 태자인 담덕(談德)도 왕위에 오른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는 부친과 함께 진중(陣中)에서 연군(燕軍)을 격멸할 작전 계힉을 세우고 있는 젊은 왕제에 불과했다. 하지만 담덕은 단순히 무장(武將)으로 자기 역할을 규정짓지 않았다. 때를 기다리면서 미래의 목표를 설정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앞으로의 행동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태왕의 이 같은 군중 경험은 훗날 3군을 통솔하여 친정(親征)하는 배경이 된다. 그런 태자 담덕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고구려가 처한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즉, 이 시기 동북아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대격변기에 놓여 있었다. 흉노(匈奴), 갈(羯), 선비(鮮卑), 저(氐), 강(羌) 등 북방의 오호(五胡) 이족(異族)들이 대거 중국에 진출해 각기 국가를 세우고 난립한다. 이 시기를 5호 16국 시대라고 하는데, 중원(中原)에서는 부견(符堅)이 막강한 병사를 모아 중원의 열국을 거의 통일하고 동침(東侵) 계획을 세워 명장 모용수(慕容壽)와 더불어 암중모색하고 있었다. 이처럼 고구려가 처한 국내외 정세는 바야흐로 폭풍전야에 놓여 있었다. 이런 시기에 부견은 천하를 도모할 야욕을 가지고 고구려의 소수림왕에게 문벌책(文伐策)의 일환으로 불도(佛道)를 보내 이를 권장한다. 부견이 어떤 이유로 불교를 전해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불교의 내세관이 고구려인들의 강한 정신적 기상을 염세적으로 만들었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무렵, 고구려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중신들 사이에 화(和)·전(戰) 양론으로 국론이 분열된다. 조정에서는 불도의 영향을 받아 살생을 증오하고 전쟁을 기피하는 화평론(和平論)이 일어났고, 한편으로는 지경(地境)을 침략하는 백제와 중원의 열국을 무력으로 제패해야 한다는 전쟁론(戰爭論)으로 팽팽히 갈려 있었다. 때마침 이런 일련의 대외 관계에서 연나라에 납치되었던 주국모(住國母)가 돌아오자 조정에서는 화전(和戰)을 주장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이 같은 형세에 담덕은 부친의 뜻에 따라 국위를 손상하는 굴욕적 화평을 반대하고 군국책(軍國策)을 내세우는 주전론(主戰論)에 속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때마침 변경을 침략하는 백제와 중원의 열국을 무력으로 분쇄해야 한다는 전쟁론이 강력 대두됨에 따라 주전론(主戰論)을 주도했던 담덕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여기에는 정치적 역학 관계나 고구려가 처한 지정학적 위치가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보인다. 더구나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고구려는 이 기회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팽창 정책을 꾀할 기회를 잡게 되는 것이다. 태왕의 대외 정복은 바로 이 같은 동북아의 국제 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그 시대 고구려는 태왕을 필요로 했고, 태왕은 운명적으로 그런 역사적 요구에 부응한 것이다. 고구려의 주전론 선택은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판단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고구려는 끝없는 중흥의 길로 뻗어나가며 태왕의 천하경영이 그 웅혼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태왕은 즉위와 함께 혼란이 거듭된 국내외 정세를 일사불란하게 수습하고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데 진력한다. 분열된 국론을 통일하고 강력한 국방정책을 실시한다. 힘에 의한 평화 사수를 천명한 것이다. 나아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군사 경험을 살려 왕위에 오른 후 직접 삼군(三軍)을 통솔함으로써 열국을 평정한다. 그리하여 4세기에서 6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고구려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 시기는 광개토태왕으로부터 시작되어 장수왕, 문자명왕으로 이어지는 국운융성의 시기가 펼쳐지며 고구려를 당대 제일의 제국적 국가로 만들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태왕의 국가경영실적이 반영돼 이후 2백년의 번영을 가져오는 민족중흥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그 결과 5세기 동아시아 질서는 고구려 중심으로 재편되게 된다.

당시 태왕이 취한 군국책은 군사에 필요한 정책을 수행하는 하나의 행정 기구적 성격을 지녔다. 강력한 힘에 의한 팽창책으로 고구려는 명실상부하게 강국으로 자리를 잡게 되고 열국으로부터 조공(朝貢)을 받는 관계를 맺게 되는 셈이다. 군사력을 우위로 새로운 국제질서를 형성해 낸 것이다. 이는 고구려인의 기상을 한껏 드높이기에 충분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고구려 유적과 유물들은 그러한 자신감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다.

고구려 웅비의 계기는 주체적 문화를 바탕으로 힘을 기른 다음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꿰뚫어 보고 거기에 탁월하게 대응한 국가 CEO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대의 요청에 부응해 태왕은 즉위와 동시에 강력한 카리스마로 사방 경략을 꾀하고, 대제국의 면모를 과시한다. 역사가 태왕을 세계제국의 경영에로 초대한 것이다. 이처럼 태왕은 위기 속에서 성장해,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고, 이를 특출한 리더십과 안목, 실행력으로 돌파해 가면서 민족사의 한 획을 긋게 된다. 이런 태왕의 업적은 태왕이 세상을 떠난 뒤 2년 후인 414년 그의 아들 장수왕에 의해 세워진 웅장한 광개토태왕릉비로 더욱 부각되게 된다.

태왕의 고구려는 우리 역사에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적극 공략을 통한 승리의 역사를 펼쳐 보이고 있다. 이는 후세의 찌들어간 역사와는 전혀 다른, 우리 민족 고유의 박동이 느껴지는 산 역사이자, 대륙의 역사이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가 고구려사를 과거의 역사가 아닌, 우리 핏줄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현재의 역사로 부활해 내는 작업의 전범(典範)이 된다. 역사를 통한 경영학의 한 단면이 태왕의 제국 경영에 무한한 자부심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광개토태왕의 왕도(王道)수업>

태왕은 천하경영의 구상을 어떤 경로를 통해 하게 되었을까? 그의 왕도교육에는 어떠한 특별한 점이 있을까? 이 같은 점을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글로벌 경영을 지향하는 우리에게 역사상의 산 교훈이 될 수 있다. 여기서는 태왕의 왕도교육의 핵심을 살펴보기로 한다. 태왕은 선택받은 왕도의 수업을 어려서부터 받지는 못하고, 일반 장상(將相)의 자제와 더불어 경당에서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부왕인 고국양왕(故國壤王)이 제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의 아우로서 군중(軍中)의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국법에는 왕족이라 해도 군권을 위임 받으면 무인으로서 문벌이 결정된다. 따라서 이련(伊連, 고국양왕)은 왕이 아닌 장상(將相)의 문벌로서 행세를 해야 했고, 따라서 자녀 교육도 이에 따라야 했다. 그런 이유로 태왕도 왕도교육이 아닌, 장상이나 서민들이 받는 경당의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소수림왕은 재위 연간에 태자를 책봉하지 못하고 붕어했다고 되어있다. 부친이 왕이 된 후, 담덕(談德)도 따라서 원자가 되었고 태자로 책봉된다. 그러나 이 시절에 이미 태자 담덕은 성년이 되어 남쪽의 백제와 북의 연(燕)을 응징하는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담덕은 태자의 교육이 아닌, 소수림왕이 재건한 태학(太學)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태왕의 교육에는 군중(軍中) 교육이 우선시 되었을 것이다. 태왕은 원래 무장(武將)이어서 군사에 관해서는 선지선장(善之善將)의 재질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특질로 “체격이 웅위하고 뜻이 높았다.”고 하는 것은 이 같은 점을 짐작케 한다. 군중 교육은 무인뿐만 아니라, 천문․지리․문예․의술(醫術) 등의 태학은 물론이요, 세객(說客) 등이 많은 까닭에 실험을 통한 실증교육이 중점요소였다. 담덕은 어려서부터 경당, 그리고 군중의 군사(軍師)들로부터 홍범의 구경(九逕)을 비롯해 이론적인 학문을 체득하게 된다. 태왕은 이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출전(出戰)시 친정(親征)하여 진두지휘 했던 것이다. 나아가 성지(城地)를 축성(築城)하거나 농경(農耕)에 있어서도 몸소 지도하고 권장하였다. 이는 군무(軍務)의 일환으로 몸소 익힌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실증적 교육은 고구려를 천하에서 제일 막강한 나라로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훗날 그가 정복을 통한 현장경영과 학업이 맞닿는 진선미(眞善美) 경영을 실현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더불어 군사와 경제, 정복과 문화융성의 통일성이 구현되는 리더십의 일면을 예측케 한다.
ⓒ전경일, <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