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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

고조선을 계승한 뿌리

by 전경일 2010. 5. 15.

고구려인들은 스스로 믿기를 그들은 자신을 ‘천손(天孫)’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의 국가는 하늘의 자손들에 의해 통치되는 ‘천손국(天孫國)’이며, 그러기에 그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제국의 시민답게 고구려인들은 자주 의식이 매우 강했고, 민족 자아성이 무척 강했다. 고구려인의 독자적 천하관은 중국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 같은 천손 개념은 중국 한족 왕조의 추상적인 천자 개념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것이었다. 당당한 독립 국가라는 점에서 보다 고구려다운 색깔이 뚜렷히 나타난다. 그러기에 모든 면에서 자신감에 가득 찼고 위풍당당했다. 이 같은 믿음은 천하를 경영하는데 거침없이 나타난다. 광개토태왕비와 중원고구려비는 이런 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능비의 서문과 모두루 묘지명에는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을 ‘천제지자(天帝之子), 황천지자(皇天之子), 일월지자(日月之子)’ 등으로 최고의 존칭을 써가며 존엄성을 기리고 있다. 즉, 하늘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고구려가 천손국으로 하늘과 혈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또한 왕의 초월적 지위를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왕이 지배하는 고구려는 신성국이며, 왕의 권위가 미치거나 미쳐야 한다고 여기는 공간은 고구려인들이 생각하고 있던 천하(天下)인 셈이다. 따라서 천하는 고구려왕의 권위 하에 종속되어 있거나, 종속되어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주변 나라들을 아우른 공간이다. 그러기에 고구려와 이들 주변국과의 관계는 상하(上下) 조공(朝貢) 관계였다.

그들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상하 질서를 형성한 국제질서를 유지해 나가는 것을 ‘수천(守天), 즉 ‘천도(天道)’ 또는 천제(天帝)의 뜻을 지켜 나가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왕은 수천의 주체임을 자임한다. 이처럼 고구려인들에게는 사방 천지가 자신들의 천하였던 셈이다. 능비의 표현은 이 같은 사실을 재삼 확인시켜주는 일 과정인 셈이다.

태왕의 업적은 비문으로 보거나,『삼국사기』로 보아도 탁월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태왕의 살아서의 놀라운 경영실적, 즉 치적에 근거하고 있다. 태왕은 국가경영의 정신적 뿌리를 고조선의 성전인 홍익인간(弘益人間), 즉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두었다. 이를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인 이륜(彛倫)으로 생각하고 국가경영에 임했던 것이다. 태왕이 지향한 부국안민의 국가경영 실천은 바로 이 같은 경영이념에서 나온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같은 이념을 실질적으로 이뤄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힘에 의한 실력주의로 국가경영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실력 없이 대의만 부르짖지 않았다는 점에서 태왕의 경영 평가는 냉철한 것이었다. 열국이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패도 자체가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할 때 실천 가능하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이다.
그 예로 태왕의 치적 중에 북연(北燕)의 모용왕(慕容王)이 수십 년 이래에 침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태왕은 그들을 평정하고 북연왕이 원래 고구려의 고양고씨(高陽高氏)의 지속(支屬)이었다는 점을 내세워 종족의 은의(恩誼)를 베푼다. 이는 강대국과 약소국이 형제국의 은의로 유지되는 것, 즉 회맹(會盟)에 의한 패도의 사상의 실천이라 할 수가 있다. 힘에 의한 평정과 후속적인 평화천명으로 북연왕 고운(高雲)은 태왕의 패도 경영에 승복하는 셈이다.

이렇듯 태왕은 힘에 의한 국가경영을 자신의 중심 국가경영철학으로 삼았다. 백제가 왜의 원병을 얻어서 신라를 침공한다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을 받고 백제를 친정할 때에도 태왕은 백제와 왜군은 평정했지만, 백제를 병합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백제를 존속시키되 다만 회맹으로 친선을 유지하려는 평화적 정책의 발로였다. 형제국의 예우로서 신라의 실성왕자(室星王子)를 인질로 삼은 것은 회맹을 통해 친선을 유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태왕은 어려서부터 부친 고국양왕(故國壤王)을 따라 침략해 오는 중국의 열국과 싸우며 동북아 열국을 제패하는 패도통치를 완성한다.

태왕의 패도 사상은 신의를 존중하고 동맹국과 선의의 국교를 지속한 것이 특징이다. 당시 한족과 북융(北戎, 즉 突厥), 그리고 고구려 3국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을 제거하기 위해 돌궐과의 동맹에 태왕은 형제국의 우애로써 국교를 지속해 나갔다. 돌궐과의 동맹은 태왕이 승하하고 나서도 2, 3백년이나 지속된다. 돌궐은 고구려의 원병과 보호 밑에서 한족(漢族)의 지속적인 침략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고구려가 돌궐을 기미(羈縻)함으로써 한족 세력의 동진을 저지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기미(羈縻)’란 특정세력을 특정 지역 내 묶어 둠으로써 주적과의 갈등을 완화시키고자 하는 정책 일환이다.

힘과 평화의 두 축을 끌고 나가는 태왕의 전략은 고구려의 장기적인 목표와 일치한다. 이 같은 점은 오늘날 기업 경영에 있어 최고경영자의 전략적 의사결정이 기업의 사업 방향은 물론, 경쟁 환경에 대해서도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내부의 경영철학이 대륙으로 뻗어나가며 보다 확대ㆍ심화되는 과정을 겪는 것이다. 태왕의 경영은 이처럼 차원을 달리한 경쟁의 방식을 동북아 제국에 제시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의 역사지만, 태왕의 국가경영과 고구려인들이 지녔던 천하관은 여전히 의미심장하다. 이는 오늘날 무한 확장의 글로벌 시대에 대한 분명한 지표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전경일, <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