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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경영/통섭과 초영역인재

문제의 궤(軌)를 꿰는 질문, 왜?

by 전경일 2010. 5. 15.

역사상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큼 평생 ‘왜’로 일관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상상하는 레오나르도는 ‘페르케, 페르케, 페르케‘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방 안을 오락가락하는 모습이다. ’페르케(perche)‘는 이탈리어어로 ’왜‘라는 뜻이다. 레오나르도는 만능인으로 불렸지만, 이것은 뭐든지 잘하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왜‘를 해명하는 방식이다. 어떤 경우에는 회화가 적합했고, 또 다른 경우에는 인체 해부가 가장 적절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다방면에 손을 대서, 결과적으로 만능인이 되어 버린 것.”으로 볼 수 있다.


다 빈치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이 같은 분석만큼 정곡을 찌른 통찰은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에 다 빈치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세종과 그 벗들이 있다.
세종시대의 풍부한 상상력은 바로 통섭에서 나왔다. 그 시대의 창조적 기풍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거의 전 분야에서의 기술적, 문화적 통섭을 이뤄내며 창조시대를 열어젖혔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이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단연코 국왕인 세종 자신이 창조적 천재상을 구현했다. 세종은 국가의 흥망(興亡), 군신(君臣)의 사정(邪正), 정교(政敎), 풍속(風俗), 외환(外患), 윤도(倫道) 등 유교적 철학원리에 입각해 국정을 운영한 것은 물론, 수학, 음운학, 음악, 천문학 등 당대 전 학문분야에서 르네상스형 만능인이었다. 조선 초의 지식 대혁명은 국가경영자의 창조적 역량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국왕이 이렇듯 창조적이다 보니, 당시 요구됐던 인재상 또한 언필칭 크로스 오버형이었다. 이 시기 세종과 더불어 창조시대를 열어 나간 천재들, 예컨대, 장영실, 정초, 이천, 남급, 신숙주, 박연 등은 대표적인 통섭형 인물에 해당된다. 이들 모두 세종과 더불어 앞선 시대를 이끌어 나간 특정 분야에 한정되지 않은 초영역 인재들이었다.


예컨대 장영실은 천문 지리, 천문 관측 및 수학적 재능이 풍부했고, 당시 최첨단의 이슬람 과학기술에 정통했다. 15세기 세계에서 최첨단이었던 초정밀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를 발명하고, <측우기(測雨器)>, <해시계>, <대간의(大簡儀)>ㆍ<소간의(小簡儀)> 및 기타 기계건축과학 분야에서 놀라운 개발을 해냈다.


장영실이 개발한 <간의(簡儀)>는 갈릴레이의 망원경이 나오기 전까지 가장 정밀한 관측기구였다. 그는 과학기기는 물론이고, 악기 제작 분야에서도 정밀한 측정과 제작의 역량을 발휘해 500여 매의 편경이 각기의 정해진 음정을 맞추도록 하는데 탁월한 성과를 드러낸다. 이런 그의 공학적 지식과 경험은 당시
30만 명이 투입된 초대형 토목 공사인 도성성곽수축공사에서 일획을 긋는다. 과학 기기를 발명해 낸 것뿐만 아니라, 그가 참여한 조선 초 지상 최대의 건설토목공사는 그의 영역을 뛰어 넘은 천재성이 발휘된다. 이때의 도성성곽수축공사는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참여한 국책 프로젝트였다. 정인지ㆍ정초 등이 고전을 조사하고, 이천ㆍ장영실 등이 그 제작을 감독했다. 또한 <자격루> 개발시에 장영실은 이천ㆍ김조 등과 머리를 맞대고 과학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가 이 같은 업적을 낼 수 있었던 배경은 폭넓은 지적경험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정초는 어떨까? 그는 조선 농업의 생산성 증대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농사직설(農事直設)》을 변효문과 더불어 편찬한 것은 물론, 금속 활자인 <경자자(
庚子字)> 제작에까지 뛰어들어 탁월한 결과를 도출해 낸다. 군졸 수백 명을 한번 보고 다 기억했을 정도로 놀라운 기억력을 지닌 그는 농업과 금속학이라는 영역을 뛰어 넘어 통섭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남급은 제기(祭器)주조 및 주전소(鑄錢所) 감독을 맡았고, 주자(鑄字)의 일을 맡아 성공시켰다. 또한 활자제조 및 인쇄분야에서 혁신적인 성과를 낸 명실공히 기기 제작 분야의 실무 전문가였다. 그들은 십 수 년간의 연구 끝에 새로운 자판을 만드는데 성공하여 활자 주조술과 활판법을 혁신시킨다. 이에 따라 세종시대 지식혁명의 핵심도구인 갑인자는 1434년 4월부터 9월까지 20여만개가 주조되어《동국통감(東國通鑑)》등 학술서의 대대적 보급에 기여하게 된다. 이 무렵, 조선의 국영인쇄소에는 150여명의 직인들이 일하고 있었는데, 인쇄공정에 따라 목판 작자장(作字匠), 활자주조를 맡은 주장(鑄匠), 인쇄담당 인출장(印出匠), 교정장(校正匠), 균자장(均字匠), 제본장(製本匠) 등으로 나눠어졌다. 유럽이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채 40명이 안되는 인쇄소가 있었던 것에 비해 세종시대의 인쇄혁명은 가히 3세기나 앞선 선진성을 드러냈던 것이다.


<갑인자>
1437년 갑인자로 찍은자치통감강목. 청동활자의 정밀한 규격화를 이뤄내며 세종시대 조선활자의 표준화·규격화를 통한 기술혁신의 결정판으로 불린다. 이 활자는 목판 인쇄를 주류로 하는 중국의 기술적 한계를 뛰어 넘은 것으로, 16~17세기 일본 및 중국의 청동활자 인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활자는 두 종류 20만자로, 당시 기술 과학자들이 총동원된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세종시대 청동활자를 통한 인쇄는 양과 질 면에서 당시 세계 최고·최대 수준으로써 동북아 문화를 크게 향상시켰다. 활자 혁신은 조선화포(세종 27년, 1445년) 제작시 원천기술로 작용하며, 나아가 민간에 놋그릇이 급속히 보급되는 계기가 된다. 성공 프로젝트를 통한 지식과 혁신의 확대재생산이 산업 전 분야에 걸쳐 나타난 셈이다. (참고: 손보기, 세종시대의 인쇄 출판, 『세종문화사대계 제2집 총론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 85~232쪽.)

이천의 경우에도 대마도 정벌 시 원정용 군선 개발 사업에 참여하였고, 원정 부대와 더불어 직접 참전했다. 또한 청동활자인 경자(更子)·갑인자(甲寅字)를 개발해 내는 것은 물론, 음악 분야에서 이론 분야를 세우고 악기를 만들었다. 악기 개발에는 그 외에 당대의 초영역 인재들인 박연ㆍ맹사성ㆍ남급ㆍ정양ㆍ장영실 등이 공동 참여했다. 이 무렵에 대략 200여개의 악기가 개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 화포제작을 비롯, 환도(還刀)와 창 제작 체계의 정비와 조선(造船) 체계 정비에도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도량형을 통일해 1,500개의 정확한 저울을 만들어 낸다. 이는 정교한 금속공예와 주조법에 뛰어난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게다가 정초는 장영실, 김빈 등과 각고의 노력 끝에 <대간의>와 <소간의> 등을 건립했으며, <해시계>, <자격루>, <옥루>, <혼상의> 제작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가히 음악, 기계공학, 조선, 무기, 활자 등 다방면에 걸쳐 두루 그 역량이 미쳤던 것이다.

신숙주의 경우에는《훈민정음》창제를 위해 음운학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중국어ㆍ일본어 등에 능통하였으며, 외교가ㆍ시인ㆍ정치가 및 국방 전략가 등의 임무를 두루두루 수행했다. 천하 최고의 ‘음재(音才)’인 박연의 경우에는 음의 기준을 새로이 세웠는 바, 그는 곡식의 낱알인 기장 100알을 쌓아 올린 길이를 황종척 1척으로 정해 음의 표준 창시자로 부상했다. 박연과 관련되어 “앉으나 누우나 늘 가슴 사이에 두 손을 포개고 악기를 다루는 시늉을 하고 입 속으로는 율려(12율) 소리를 내곤 하였다.”는 일화는 당대 천재적 인재들의 노력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런 영역을 뛰어 넘는 인재들에 의해 세종시대의 찬란한 문물은 드디어 어둠 속에서 나와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시대의 초영역 인재들은 어떻게 해서 크로스 오버형 지식을 쌓고, 강화해 나갈 수 있었을까? 더구나 핵심인재를 뛰어 넘어 초영역 슈퍼인재로 육성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해답은 다름 아닌, ‘학습의 힘’에 있다. 임금과 신하가 매일 진행하는 학술세미나인 경연(經筵)을 비롯해, 변계량의 기획 작품인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의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사가독서제란, 독서를 주어 복수전공제를 실시하도록 한 것이었다. 기간 중 학자들은 한두 가지 연구주제를 주어 전문적으로 파고들게 했다. 그 예로 권채에게 주어진 과제는 《대학》과 《중용》이었는데, 그는 책에 붙어 있는 주석까지 철저히 파고들어 확실하게 깨닫는데 꼬박 3년이나 파고들어야 했다.

집현전이란 지식탱크는 지식을 모으고 엮는데 주요한 ‘앎틀’이었고, 세종시대의 문풍이 드높아지게 된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기 인재들은 전문지식을 더욱 고양시키고, 다방면의 지식을 통섭해 내기 위해 경학ㆍ사학ㆍ과학ㆍ음악ㆍ의학ㆍ천문ㆍ지리ㆍ의약ㆍ복서ㆍ문자학ㆍ음운학 등 각 분야의 학문을 연구했다. 즉, 세종시대의 정치철학인 ‘유학(儒學)’ 이념을 실현시킬 목적으로 실물 분야에 한 두 가지씩 몰입토록 한 것이다. 이를테면 철학을 배경으로 한 인문학(요즘 유행하는 말로 문사철)이 만개했던 셈이다. 의심할 바 없이 이러한 학문적 성취는 훗날《훈민정음》, <정대업>ㆍ<보태평>, 각종 과학 및 IT기술, 의학서적의 발간 등으로 확산되고 이어지며, 경계를 뛰어 넘어 뭉치고 흩어지며 세종시대의 문화 대회전을 여는 지적 기반이 된다. 이것이 한국형 르네상스 요컨데, 세종 자신이 꿈꾸었던 극도로 풍요롭고 평등한 경지인 ‘대풍평(大豊平)의 세상’을 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 눈으로도 그 시대에는 통섭을 통해 최고의 경영단계를 이뤄냈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앞서 시오노 나나미가 언급한 바와 같이 ’왜‘를 찾는 적합한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반면에 세종시기 르네상스는 굳건한 위민(爲民)철학의 실천과정에서 크게 부각된다. 다수 인민을 위한 고양된 정치철학의 결과물로 창조가 채택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지식과 경험은 어떻게 해서 하나가 되어 폭발적인 지적 혁명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각 학문 영역을 연결하고, 뛰어넘고, 파괴까지 하는 학습이 새로운 창조 방식으로 받아들여진 게 주효했다. 집현전 인재들의 학제간 연구에는 통섭형 사고가 축을 이루고, 그들은 세종의 정치철학을 수반하는 방식으로 왜 사물의 이치가 그런지 묻고 대답했다. 실마리를 잡은 듯한 것에 대해서는 실험을 통해 발견해 냈고, 피나는 노력 끝에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다. 일테면, 윤사웅은 세종과 더불어 서운관 천문대에서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천문의 수학적 원리를 상상했을 거고, 그러기에 조선에 맞는 천문, 역학을 생각해 냈을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이런 학습풍토와 노력이 작용해 세종 시대의 지식은 심화되어 갔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집적된 지식, 경험을 상호간에 연결해 지식의 수레를 이루고, 창조의 바퀴가 굴러가게 했다. 그 같은 창조시대의 개막을 국왕으로서 세종은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지식과 경험의 궤(軌)를 꿴 것이다. 이 바퀴를 움직이는 궤는 유교적 철학 원리로 법도(法度)에 맞는 '경영의 길'이었다. 한편, 이 같은 굴대는 새로운 시대로 힘차게 굴러가는 창조의 완성을 뜻하기도 했다. 창조의 바퀴를 굴려 역사의 바퀴를 진전시키고자 한 그 시대 초영역 인재들의 노력은 오늘날 경영자에게 멈추지 않은 창조방식의 전형으로 보여질 만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나 세종시대처럼 오늘날 기업들이 창조경영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창의성, 전문성, 다양성, 개방성, 유연성과 같은 보다 창의적인 기풍이다. 나아가 이들 혁신 요소간의 결합이다. 그간 우리 사회는 무엇 때문에 역사적으로 출중했던 창조적 경험과 그 시대의 성취를 묻어두고 있었을까? 여기에 오랜 창조의 암흑으로써 세종시대와 현재의 간극이(영정조 시기와 같은 특정 시점은 제외하고라도) 놓여있다.

창조가 풍미하는 시대와 사회는 영역을 뛰어 넘는 통합적 사고와 실천력을 요구 한다. 지금까지 한국 기업에 팽배한 순혈주의, 균질한 인재, 근면성, 통제, 폐쇄성과 같은 것들은 21세기 생존방식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혁신을 부르짖으면 어느 조직이건 내부의 저항과 기득권층의 교묘한 이해가 개입돼 자칫 퇴색될 수 있으나, 창조에는 눈 가리고 아웅 할 수 조차 없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새로울 것들뿐이다. 남다른 생각과 행동만이 미래를 위한 경영으로 다가올 것은 자명하다. 오늘날 우리 기업에서 융합형 인재, 창조적 실험이 각별히 주목받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전경일, <초영역 인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