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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보기고

브라질 땅콩과 한국 땅콩

by 전경일 2010. 7. 20.

대충 보면 크기가 일정한 것 같아 보이지만 땅콩은 생김새도 크기도 제각각이다. 이 땅콩들을 아무렇게나 캔에 담아 운반하다보면 이른바 '대류(對流)현상'이라는 것이 발생한다. 고객이 슈퍼마켓이나 마트에서 캔의 뚜껑을 열면 언제나 큰 땅콩들이 위로 올라와 있는 걸 보게 되는 데 바로 이런 현상을 가리킨다. 캔이 공장을 떠나 자동차에 실려 슈퍼마켓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큰 땅콩들은 계속 위로 올라오고 작은 것들은 밑으로 가라앉게 되기 때문.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미관상 좋아할 수밖에 없는 현상인데, 이것을 물리학자들은 '브라질 땅콩 효과(Brazil Nut Effect)'라고 부른다. 자연에서, 일상생활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현상에 특별한 '효과'를 붙인 것은 그 현상이 지닌 보편성과 중층적 의미구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땅콩을 경영학자들은 신(新)자유주의 경제에 빗대, 캔 속 땅콩처럼 소수의 부자들은 더 위로 올라오고, 많은 중산층들은 더 밑으로 내려가는 현상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경영학자들은 가게까지 운반 도중 트럭에서 요동치는 과정을 경쟁 환경으로 보고, 경쟁을 통해 초우량 기업이 탄생하고 나머지 기업은 가라앉거나, 사라져버리는 것으로 빗대곤 한다.

위와 아래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는 캔 속 땅콩 세계에 엄연히 적용돼 크고 작은 것의 각자 위치를 정해 준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겨난다. 캔의 가운데에 위치한 땅콩들은 어떤 크기일까 하는 점이다. 당연히 크고 작은 것 틈에서 버티고 있는 중간 크기들일 것이다. 그것이 캔의 밀도에 균형추 역할을 할 터다. 중간 크기의 땅콩이 튼실하면 위, 아래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땅콩이 아닌, 틈새에 끼인 호두알 신세가 되어 버릴지 모른다.

그런데 밀폐된 환경을 한번 바꿔보자. 만약 이 땅콩들을 체에 쏟아 붓고 까분다고 생각해 보자. 체를 칠수록 캔 속에서처럼 위, 아래의 고저는 사라지고, 앞뒤, 혹은 좌우의 평면이 되어 버리며 땅콩은 자연스럽게 그룹핑이 된다. 즉, 크기별로 각자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물론, 잘 까부르기만 하면, 크기별로 땅콩을 선별해 낼 수 있다. 이 또한 땅콩장수에게는 환영할만한 일일 것이다. 상품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가치를 높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브라질 땅콩 효과(Brazil Nut Effect)'는 다른 경지를 보여준다. 즉, 환경 영향으로 소득 수준이나, 경쟁 환경을 설명하는 것이 아닌, 보다 다원화된 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

흔히 문화적 다양성을 얘기할 때 우리는 그 전제조건으로 유연성을 말하곤 하는데, 그것은 그 사회가 가진 풍부한 수용성을 뜻한다. 나와 다른 남, 우리 문화와 다른 타방의 문화, 특정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어떤 것도 논의되고 받아들여지는 다원적 가치 같은 게 바로 그것일 터다. 개방성이라는 게 이것을 뜻한다.

한번 예를 들어보자. 얼마 전 있은 동계 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이 보여준 활약상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각 종목에 나선 선수들의 열정적인 경기를 보며 생각하게 된 것이 있다. 바로 이전 세대와 달리 전혀 그늘지고, 주름 잡혀 있지 않다는 것. 경기에 임하는 진지한 자세는 이전 세대와 비교해도 전혀 뒤질 것 없지만, 새로운 승부 근성이 DNA에 새겨져 있으면서도 '개인주의와 도전의식 누구보다 강하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과거처럼 '고생'한 흔적 보다는 '도전'한 흔적이 더 돋보였기 때문에 즐기며 플레이하는 경기가 뭔지를 잘 보여준 것 아닐까? 그래서 온 국민들이 다 함께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갖게 된 것은 아닌지...

모태범 선수가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금메달이 확정되자 태극기를 몸에 두른 채 두 손을 하늘로 콕콕 찌르며 덩실덩실 춤을 춘 것이나, 김연아 선수의 당당하고 대담한 플레이며, 결과를 '쿨(cool)'하게 받아들이는 각 선수들의 모습은 과거처럼 '쪼아서' 만들던 선배 세대의 선수들과는 판이하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도대체 우리가 기억하듯 태극기가 올라갈 때 보여주어야 할 비장함이랄까 하는 건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을 가리켜 영어 'Green'과 'Global'에서 따온 G세대라는 명칭을 쓴다는데 여기에는 88올림픽 이후 태어난 세대들의 건강하고 적극적이며 미래지향적이고 세계화된 이미지가 가득 들어 차 있다. 다시 말해 위, 아래가 아닌, 평면으로 전체 세계를 조망하는 의식이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번 동계 올림픽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된 또 하나의 '진실'은 이런 무한한 확장성을 가진 면(面) 개념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캔 속 땅콩처럼 좁아터진 곳에서 서로 치고 받으며 줄 세우기를 해야 하는 '브라질 땅콩'이 처한 폐쇄적 세계가 아닌, 세계를 무대로 뛰며 각자의 노력대로 모양과 크기를 다시 정렬하고 세우는 '한국 땅콩'의 새로운 패러다임 아닐까 싶다. 그것을 하나의 '효과'로 발전시키려면, 글쎄 나처럼 나이든 세대들은 문화적으로 보다 유연해지고, 개방성과 수용성을 높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끝으로 팁 하나! 그런 가치가 괜히 튀는 게 아닌, 깊이 있는 문화 강국 대한민국의 저력이라는 것을 한국 땅콩들은 사회 곳곳에서 이젠 보여줄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브라질 땅콩 신세보다는 한국 땅콩의 통통 튀는 모습이 더 탱탱하고, 박력 넘친다고.

<행복한 동행>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초영역 인재》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