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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누르하치: 글로벌 CEO

소에 고삐를 묶다 vs. 소, 고삐에서 풀리다

by 전경일 2010. 7. 27.

명(明)으로 봐서 이제 누르하치는 완전히 고삐 풀린 소의 모습이었다. 한족이 역사적으로 항시 우려한 게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변방에서 일어나는 이민족의 도전을 막고자 한족은 오래전부터 ‘위(衛)’라는 군사단위를 설치한다. 나아가 지방의 부족장을 통해 이민족의 각 부족들을 통제하는 간접 지배 방식을 취했다. 당연히 이 부족장들은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사람들로 채워졌으며, 지위를 세습시킴으로써 한족은 그들로부터 지속적인 충성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중국은 이 같은 소고삐 정책을 통해 변방을 중국의 행정체계에 편입시키려 했고, 이민족에 의한 이민족의 지배라는 이이제이 방식으로 친중 사대정권을 수립했던 것이다. 이는 현재에 와서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 한족의 대(對)변방 정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몽고족에게 적용되던 ‘위(衛)’는 1403년 들어 여진족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때 최초의 여진족 위소(衛所)인 건주위가 요동의 동북지방 부족들 사이에 설치되었다.

이 같은 당근과 채찍을 이용한 분할 통치로 여진 사회는 오랫동안 교묘하게 유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반명(反明)의 기치 하에 누르하치는 여진 제 부족을 통일하고 일어나 지배자인 명조(明朝)와 한 판 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오랜 시간 이어온 예속과 굴종의 역사를 끊어버렸음은 당연하다. 위소(衛所)를 통한 분할 통치 방식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이 제도는 한번 시작되자마자 급속히 퍼져 나갔다. 이 같은 지배 방식에 대해 한족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것은 기미(羈縻)하고 통어(統禦)하는데 최선의 계책이다. 부족들이 분열되면 그들은 약화되어 지배하기 쉽고, 부족군들이 서로 떨어져 있게 하면 그들은 서로 소원해져서 복속하기 쉽다. 우리는 이들 각자를 제각기 영웅처럼 느끼게 하고 자기네끼리 싸우게 한다. 만이(蠻夷)들이 내부 상쟁에 빠지는 것이 중국으로서는 기회가 된다는 공식이요, 이론이다.”

중국의 다른 민족에 대한 이 같은 일관된 분열정책은 누르하치 등장 이전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여기서 얘기하는 한족의 전형적이고 핵심적인 지배 방식인 ‘기미(羈縻)’란 무엇인가? 기미(羈縻)란 소를 고삐에 묶어 두는 것을 말한다. 오랜 기간 중국은 기미 정책을 통해 타민족에 대한 통제를 가한 바, 그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소를 고삐에 묶어두어 소가 고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2) 고삐에 묶인 소는 던져주는 먹이에 길들여진다.(공물, 사대, 관직 부여 등의 방식) (3) 소를 보고 나타난 범은 소를 노리지 결코 소 주인을 노리지 않는다. 따라서 한족은 언제나 직접적인 해를 피한다. (4) 분쟁 발생시 최소한 소의 위치가 경계지점이 되도록 한다. (5) 나아가 향후 소의 위치에 대해 기득권을 주장할 근거를 마련한다.

중국은 여진사회를 통제함으로써 여진 자체를 무력화시킴은 물론 조선의 여진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동시에 약화시키고자 했다. 실제 명은 여진족에 사신을 보내 선물을 가지고 번속적(藩屬的)지위(중국의 울타리를 이루는 속국으로서의 지위)를 수락케 하는 협상을 하여 조선의 세력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려 했다. 이 모든 전략은 동북면에서 한족이 전략적 우위를 잡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현재 중국이 조선족에 대해 취하는 격리정책도 바로 이 같은 분열과 기미정책을 교묘하게 혼합해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누르하치 등장 시기에도 명은 여진 제 민족의 통일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여진 사회에서 누르하치의 출현은 바로 오랜 시간 그들을 묶어 온 고삐를 끊어버린 일대 사건이었고, 이 같은 역사적 부름을 받은 누르하치는 마침내 그 뜻을 이루어 냈다. 청조(淸朝)의 설립은 바로 그런 노력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전경일, <글로벌 CEO 누르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