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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세종 | 창조의 CEO

오래된 새로움, 창조의 CEO 세종을 만나다 <下>

by 전경일 2011. 1. 19.
세종은 시간 측정에 각별한 관심
교보문고 독서경영대학 창조학기 1~4강 <下>
 
[23호] 2011년 01월 01일 (토) 여주=곽진영 기자 foodcoop@gamsa.or,k
 
교보문고 독서경영연구소(송영숙 소장)가 주관하는 독서경영대학 창조학기가 지난 12월 16일(목)에 고은 시인의 강연(9강)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기자는 본지 21호(11월 30일자 9면, 헌인릉 일원)에 이어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 소장이 안내를 맡은 여주 영릉 답사기와 여주박물관에서 진행된 강연 내용을 소개한다.
이천의 쌀밥집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일행들은 곧바로 여주읍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영릉을 찾았다. 영릉(英陵)은 세종대왕(이후 ‘대왕’)과 소헌왕후를 합장한 능이다. 대왕은 조선조 제4대 왕으로 1418년에 승하하니 재위 32년에 춘추가 54세였다.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한글(훈민정음 1997년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을 창제하고 측우기, 혼천의, 해시계 등 과학기구를 발명하고 제작하였다. 아악을 정립하고 북방의 야인을 정벌했으며 4군과 6진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정하였으며, 일본 대마도(쓰시마)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학문을 숭상하여 학자를 기르고 활자를 개량하여 ‘월인천강지곡’(부처의 공덕을 칭송한 노래). ‘농사직설’(농업기술을 모은 책), ‘삼강행실도’(윤리덕행을 찬양한 책), ‘팔도지리지’(한국의 지리책), ‘석보상절’(석가의 일대기), ‘의방유취’(의학백과사전) 등 수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또한 농업을 장려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어진 성덕이 하늘같이 높았다.

 
   
▲ 영릉 초입 야외전시장에는 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는 천문시계인 혼천의 모형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만원권 지폐 뒷면의 도안으로도 채택되어 있다. (사진=곽진영 기자)
 

임금은 하늘로부터 때를 받아 백성들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다.
   
▲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 소장이 자격루 앞에서 세종대왕이 실시간을 측정하여 조선의 백성들에게 차례로 알렸던 것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영릉으로 오르는 길 왼편 세종대왕기념관 입구에 사적 195호인 영릉(세종··소헌왕후) 현판에 담긴 대왕의 일생이다. 영릉은 원래 서울 헌릉 서쪽에 있었는데 예종 원년(1469)에 여주로 옮겨 왔다. 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숭모하고 그 위업을 이어 받아 민족문화 창조의 기틀로 삼고자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세종전을 새로 짓고 경역(境域)을 정비하여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 기념관 옆 야외전시장에는 간의, 혼상, 천평일구, 현주일구, 정남일구,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자격루, 수표, 규표, 혼천의(만원권 지폐의 뒷면 도안) 등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유독 하늘(천체)과 시간과 관련이 깊은 특히, 시계 등의 발명품들이 많다. 왜 그럴까?

“임금은 하늘이 내린 사람으로, 백성을 밑으로 하고 하늘과 유일하게 맞닿아 교감하는 사람입니다. 하늘의 뜻을 받아 국왕이 되는 것이므로 하늘 그리고 시간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건 당연하죠. 유교사상에 따르면 임금은 하늘로부터 때를 받아 백성들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습니다.”

전 소장은 대왕이 시계(時計) 류에 발명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이유를 말한다. 당신이 경영하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지금 몇 시 몇 분인가? 경영자로서 대왕은 해를 365등분하여 1년을, 지구를 24등분하여 하루 24시간을 구분하고 마침내 조선의 시간을 조선의 백성들에게 알려준다.

지나가는 건 시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들
대왕은 궁궐 안에 설치한 자격루에서 시간을 측정하고, 종각 등에서 타종하는 방법으로 조선의 백성들에게 실시간을 알려주었다. 새해 원단(元旦)에 보신각에서 타종을 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새해에 타종을 하는데 국민, 정치인, 경제인들에게 나의 시간은 몇 시인가, 나는 어디쯤에 와 있는가를 스스로 묻게 하는 의미이다. 씨를 뿌릴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나아간 때가 있으면 물러서야 할 때가 있다. 그런 생각하면서 보라는 의미이다. 국가적인 원로들이 잠들어있는 의식을 깨우는 그런 의미가 있다.”

전 소장의 설명을 듣는 일행들의 표정이 숙연하다. 잘해야 100년 안팎을 지상에서 머물다 가는 사람들, 그럼에도 이 지구의 주인인 양 오만불손한 생을 살아간다. 순간 나는 농부철학자 피에르 라비가 말한, 우리가 가진 시간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어 있다는 얘기를 떠올렸다.

“인간은 시간이란 지나가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정지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에 대해 아프리카 인들에게 물으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건 시간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니까요.’라고.”

또한 우리는 지구가 인간에게 속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구는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고 우리 인간이 지구에 속해 있다. 시간과 지구환경에 대한 전도된 인간의 생각을 피에르 라비는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다.
세종19년 경복궁 안에 만든 혼상(渾象)은 오늘날 천구의처럼 하늘의 별자리를 적도와 황도 좌표의 각도로 둥근 구면 위에 표기하여 별자리의 위치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한 천문기기이다. 간의(簡儀)는 고도와 방위, 낮밤의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었던 조선시대 가장 대표적인 천문관측기기이다. 대왕은 재위기간에 천체를 관측하고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왕립천문대(간의대)를 설치하고 많은 천문기구들을 만들게 했다. 특히, 최만리 등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 농법에 맞는 우리 달력을 10년(세종14년~24년)에 연구 끝에 완성했을 때 대왕의 자부심을 대단했다.

“정력을 다해 책을 완성하여 후세가 조선이 전에 없던 일을 건립(建立)했음을 알게 하고자 한다.”(세종 26년 칠정산(七政算) 내편(內篇)을 외편(外篇) 완성하고 대왕께서 하신 말씀)

구글어스에서 내려다보니 더 확인해지는 대길지, 영릉
일행들은 영릉의 실제 입구인 ‘훈민문’을 지났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대왕의 능답게 현판도 한글이다. 역사와 풍수지리가 곁들인 전 소장의 설명이 이어진다. 1446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태종과 민경왕후의 능인 헌릉 서쪽에 묘역을 조성하여 그 우실을 왕의 수릉으로 삼았다가 1450년 대왕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당시에도 세종의 능에는 물이 나고 습하여 능지로 부적합하다고 신하와 지관들은 우려했다. 그럼에도 효성이 지극한 대왕은 아버지 곁에 묻혔다. 그리고 세조 이후 영릉이 길지(吉地)가 아니라는 이유로 종종 천장(遷葬)이 거론되었으나 조정신료들의 의견이 분분하여 무산되다가 1469년(예종 1년)에 들어 왕위계승의 혼란과 왕가의 불운이 수시로 나타나면서 천장한다. 예종은 1468년 노사신, 임원준, 서거정 등을 여러 곳에 파견하여 천장할 곳을 물색하게 한다. 이들 가운데 한 무리가 광주, 이천 등을 거쳐 여주 땅을 답사한다. 산천이 수려하고 강물이 맑은 여주 북성산에 오른 그들은 마침 산기슭에 정기가 어린 곳이 있어 올라가 주위의 지세를 살피는데, 이곳이 명당임을 금세 알 수 있었으니 그곳이 현재의 영릉 자리이다.

   
▲ 영릉은 합장릉이므로 혼유석(魂遊石)도 두 개다. 민간에서는 혼유석에 제수를 올리기도 한다는데, 혼유석은 왕이 영혼이 앉아 세상이 잘 돌아가는지 굽어보는 곳이다. 달빛이 가득한 밤 대왕과 소헌왕후가 다정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전 소장은 영릉이 천하의 명당임을 목단반개형(牧丹半開形 ; 여러 산봉우리와 산줄기가 마치 모란 꽃잎 모양으로 혈을 감싸고 있어 모란이 반쯤 피어난 모양)이며, 봉황포란형(鳳凰抱卵形 ; 봉황이 알을 품은 지세)이란 풍수용어를 들어 설명했다. 특히, 구글어스 위성사진에서 캡처한 영릉 일대의 지세는 봉황이 날아가는 모양 그대로였다. 좌청룡 우백호(내백호와 외백호가 있다)는 기본이고 펼쳐진 남한강까지 길지 중에 길지였다.

“조선왕조 500년이라고 하는데 정확히는 512년이죠. 대왕이 명당에 자리 잡은 덕분에 400년으로 끝날 조선의 수명이 100년이 늘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연하리 설화는 대길지를 차지한 왕의 미안함과 감사 표현
영릉을 천장하던 때의 일화 하나. 당시 지관이 찾았을 때 현재의 영릉 자리에는 세조 때 대제학을 지낸 이계전과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묘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인손은 광주(廣州) 이씨로 그의 할아버지는 고려 말의 절의와 문장을 이름을 떨친 이집이고, 아버지는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이지직이다. 이인손이 세상을 떴을 때 묘 자리를 잡아준 지관이 자식들에게 당부했다. ‘이 자리는 금시발복지이나 아래 세 가지를 하지 말라’고. 첫째, 명당수(明堂水)를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놓지 말 것, 둘째, 재실(齋室)이나 묘막(墓幕)을 치지 말 것, 셋째, 먹을거리 마련하느라 솥단지를 걸지 말 것. 그런데 훗날 이인손의 다섯 아들이 모두 대과에 급제하자 효심이 발동하여 개울에 돌다리를 놓고 묘 앞에는 재실을 지었다. 영릉을 천장할 데를 물색하던 대신과 지관이 이 부근을 지나다 장대비를 맞게 되었다. 춥고 배고픈데 비를 피할 곳마저 없는 상황, 그때 가까운 골짜기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아닌가. 한데 물이 불어 건널 수 없어 답답해하는데 조금 아래쪽에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그들이 찾은 곳에는 차일이 친 광주이씨 후손들이 묘제를 지내고 있었다. 따뜻한 음식까지 얻어먹고 정신을 차린 다음 주위를 살피니 그곳이 바로 천하명당이었던 것. 그렇게 이인손 등의 묘가 있던 이곳이 영릉 천장지로 결정되었다. 연기를 피우지 않았다면, 돌다리나 재실이 없었더라면 지관들이 이곳을 발견하지 못했을 거라는 얘기다. 결국 이인손의 묘는 왕명에 따라 이장(移葬)하게 되는데, 후손들이 개장(改葬)을 해보니, 그 속에는 놀라운 내용의 비기(秘記)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필시 모년 모월 모시에 이 터의 진짜 주인이 나타날 것이니 기쁘게 자리를 양보할 것, 이 자리에서 연을 띄워 연이 떨어지는 곳에 이장하면 그대 집안의 발복은 지속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신기하다며 그대로 하였더니 연은 바람에 날리어 서쪽으로 약 십리를 날다가 떨어졌다. 그 자리에 이장한 후에도 자손이 번창하였는데, 연이 떨어진 마을이라고 ‘연하리’라 하였고, 지금은 행정지명은 여주읍 연라리(煙羅里)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영릉 덕분에 조선이 100년 더 지속가능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농사)직설(直說)경영의 결과 600년 지속가능한 혁신을 이뤄낸 이가 세종대왕이다. 벼농사 300~600% 증가, 파종후 수확 4000% 증가, 인구증가율 400%, 소아(小兒) 사망률 현저히 저하, 1일 인쇄부수 2000% 증가 등 경제사회 지표들은 전무후무한 혁신의 기록을 보여준다. 지금도 농촌진흥청에서 펴내는 농사책자의 골격은 세종대왕 때 발견되고 정리된 것들이며, 우리는 대왕께서 창조한 한글로 사유하고 소통하고 있다. 연하리 설화에는 그 사실성 여부를 떠나 훗날 명당을 차지하게된 이의 미안함과 감사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태종은 잠저에서 태어난 이름이 ‘이방원’으로 세자이나 대왕(이도)의 형제들부터는 이름이 외자이다. 임금의 이름에 들어간 한자를 당대에 백성들은 사용할 수 없게 되는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한 배려이다. 또한 한 지점이 왕릉으로 결정이 되면 그 사방 십리에 무덤들은 모두 이장해야 한다. 해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조선 국왕의 왕릉들은 곳곳에 모여 있다. 역시 백성들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의 있습니다, 라고 면전에서 쟁간하는 자가 왜 없는가!
허조(1369년[공민왕18]∼1439년[세종21])는 황희와 함께 세종의 정치에서 빠뜨릴 수 없는 신하이다. 특히 정책이 잘못될 소지를 간파하고 거침없이 비판하는 것이 허조의 몫이었다. “과감한 말로 면전에서 쟁간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으며, 또 말하는 것이 매우 강직하지 않다. 어째서 중론을 반대하여 논란하는 자가 없는가?” 대왕은 ‘이의 있습니다!’라고 용기 있게 반대하는 자가 없어서 아쉽다고 말한다. 그러니 사사건건 반대를 일삼는 허조를 끝까지 중용하였으리라. 세종 21년 12월 28일 좌의정 허조의 졸기(卒記)에 수록된 다음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훌륭한 주군을 보필하면서 살다간 신하의 행복을 읽을 수 있다.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고 펴다보아도 호연(浩然)히 홀로 부끄러운 것이 없다. 이것은 내 손자의 미칠 바가 아니다. 내 나이 칠십이 지났고, 지위가 상상(上相)에 이르렀으며, 성상(聖上)의 은총을 만나, 간(諫)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시었으니, 죽어도 유한(遺恨)이 없다.”

“국가의 일을 내 자신의 임무로 여기며 살아왔다(自以國家之事爲己任)”라고 말할 수 있는 신하, 임직원, 팀원과 함께 일할 수 있는 CEO나 팀장은 행복하고 창조경영을 할 수밖에 없다. 당일 행사를 진행한 교보문고 독서경영연구소 김종철 파트장은 “창조의 CEO 세종대왕에게서 발견해낼 콘텐츠는 아직도 무궁무진하다”며 우리 곁에 “허조와 같은 동료나 팀원이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지는 것이 소중하다”고 소감을 말했다.

여주박물관 1층 세미나실, 두 시간에 걸친 전경일 소장의 강연(<세종리더십과 지속가능경영전략>)이 끝나고 일행들은 가까운 민물매운탕 집에서 저녁식사를 겸한 뒷풀이를 했다. 기자는 바람을 쐬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갔는데, 코앞에 한강이 흐르고, 어둠이 깔린 밤인데도 으르렁거리며 트럭들이 강기슭을 오가고 있다. 말로만 듣던 4대강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가 완공되면 영릉 일대의 일부가 잠길 수도 있다는 얘기를 낮에 누군가 했었다. 구글어쓰에서도 한눈에 보이는 알을 품은 주작의 지형도 바뀌는 것은 아닐까? 이제 새해, 서른세 번 보신각의 종소리가 울릴 것이다. 강을 두고 균열된 민심을 다독일 묘안은 없는 것일까? 그리고 대왕 세종과 재상 허조의 이름을 연호해본다. 정반대의 지점에서 서로를 인정하였고 서로 필요한 일을 한 사람들. 대한민국은 현재 시각, 여기 있음을 저마다 인식하는 그런 원단을 알리는 종소리를 기대해본다.  <출처: 감사나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