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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조선의 왕들

[단종] 너무 짧은 생애는 한이 되어 떠돈다

by 전경일 2011. 2. 15.

국가 경영이란 중책을 어린 왕에게 맡길 만큼 세상은 녹녹한 게 아니다. 하여 어린 왕세자는 자신의 가장 큰 후원자인 부왕이 유명을 달리하는 때로부터 한없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다. 권력 앞에 어제의 신하들은 야수가 되어 물어뜯는 게 정치판일 터! 여기 못다 핀 꽃으로 남아 영월 청령포 모래사장에는 푸른 물결 세월을 감고 도는 홍위(弘暐)의 넋이 지금도 잠 못 든다. 조선의 제 6대 임금, 단종. 그의 생애는 바람의 넋으로 떠돈다.

-왕은 스스로 왕이 되리라고 생각했습니까?

"선왕이 붕어하셨으니 내가 왕이 되는 건 당연한 이치겠죠. 헌데, 내가 너무 어려 만기를 찬람할 수 없었던 게 한이지요. 그러다보니 권력에 눈 먼 자들이 숙부를 사주해 왕위를 농락하고자 한 거고, 그게 계유정란이었던 게지요."

-왕을 보좌하겠다는 신하들이 딴 마음을 품고 있던 게 찬탈의 이유였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실은 수양 대군 자신의 욕망이 불러일으킨 결과 아니었나요?

"나는 숙부를 그렇게 보고 싶지는 않소. 그가 어찌 처음부터 역모의 마음을 품을 수 있었겠소. 조선 최고의 성왕 세종대왕의 2자 아니던가요? 게다가 위로는 형님인 문종이 계셨고. 한명회 따위의 간신의 꾐에 넘어간 게지."

-참, 속도 없으시군요. 속이 없는 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건지.

"문제는 부왕이셨소. 부왕의 허약함과 단명이 내 명을 재촉한 것 아니겠소. 그저 타고 난 박복한 운명이라고 할 밖에."

-선왕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왕의 안위를 부탁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마저도 지켜지지 못했죠?

"그렇다오. 부왕께서는 붕어하시기 얼마 전 성삼문을 비록한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셨소. 그 자리에서 나를 무릎에 앉히시고 훗날을 간곡히 부탁하셨소. 이미 병이 깊어지신 걸 알았던 것이지요. 내 나이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승냥이 떼를 막서 설 수 없었고, 나를 보호해줄 권신들도 이미 계유 정란으로 유명을 달리했으니... 세종께서 아끼시던 김종서와 황보 인, 조극관, 이양 등이 궐문에서 철퇴를 맞고 그렇게 비명횡사 했소. 참, 안타까운 일이었소."

-그것 뿐입니까? 조선은 세종대왕 시절 이룩한 찬란한 문명이 기울어 가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요?

"그렇소. 그 중 가장 가슴 아픈 일은 나의 복위를 주도하던 집현전 선비들이 사육신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오. 세종대왕께서 보위에 오르고 심혈을 기울여 만든 조선 최고의 학술기관이자, 인재들의 집단인 집현전도 이를 계기로 해체되고 만 것이죠."

-생각해 보니 왕은 조선의 르네상스와 중세의 암흑기를 잇는 고리 역할을 하신 국왕이시군요. 그 고리가 튼튼했다면 더 큰 도약을 이뤄냈을 텐데. 끊어지며 역사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고 말았으니 왕가는 물론이요, 만백성들과 우리 역사에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죠.

"이르다 뿐이요. 대왕시절의 맥을 내가 잇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 되어 내가 죽어서도 잠들 수 없소. 태백산 산신령으로 남게 된 것도 그 때문이고...

-왕께선 뭔가 각별한 노력을 하셨을 테지만, 사실은 그 무렵엔 ‘황표정사’라 해서 김종서 등 조선 창업 이래 공신들이 국사를 처지하고, 왕께선 형식적인 결재만 한 것 아니었나요? 수양이 나선 것도 그 때문이고.

"그렇기도 하겠소. 그러나 어쩌겠소. 나를 형식적으로 대하는 세력도, 나를 치려는 세력도, 다들 왕을 능멸한 불충으로나 남는 것이지. 내 한이 역사 갈피에 그대로 남아 있소.

- 짧은 왕위 기간이었지만, 나름 국사를 돌보는 노력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국사라... 너무 짧아서... 허나, 1453년(단종 1)4월엔 유생들의 시험을 보이고, 온성과 함흥엔 성을 쌓고, 나난(羅暖)·무산(茂山)에 두 성보(城堡)를 설치했고, 또 악학제조 박연(朴堧)이 세종의 『어제악보 御製樂譜』를 인쇄해 반포하기를 청하길래 허가하기도 했소, 계유정란이 일어난 다음에도 할아비를 생각하며『세종실록』을 찬진하였소. 생각해보니, 그때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던 때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나오. 어디 그뿐이요. 1454년 5월엔 좌승지 박팽년으로 하여금 경연에서 왕에게 안일과 태만을 경계하도록 진언케 했소. 실은 내가 대궐 안에서 자주 활쏘기를 구경하면서 경연을 여려 차례 중지시켰기 때문이었으나, 속내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한 것인데, 팽년이 학문으로 위안하라는 뜻을 전하려 했던 게지 뭐겠소? 아무튼 그때 나는 활쏘기를 보며 나의 어림과 약함을 탓했고, 어서 빨리 자라기만을 바랬소. 헌데, 승냥이들이 기다려주지 않고 먼저 달려듭디다."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은 홍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며 영월로 추방되고, 영원히 불귀의 객이 되고 만 임금. 그가 귀양 가서, 자규루에 올라 남겼다는 시는 누각에 빛바랜 채 풍상에 젖어 흐느끼고 있다. 두견새 슬피 우는 달 밝은 밤에/피나게 우는 네 소리 / 네 울음 없으면 내 시름도 없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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