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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조선의 왕들

[예종] 질투심과 의욕과잉이 일을 망치다

by 전경일 2011. 2. 15.

왕은 용상에 올라 국정에 임한 때로부터 대개 죽어서야 임기가 끝난다. 임기가 어느 정도 보장돼야 통치자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1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더구나 모후의 수렴청정이 점철된 것이라면... 해서 왕의 건강과 안위는 국정에 필수요소다. 세조의 죽음으로 인한 새로운 정치 지형도.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나이 어린 국왕... 조선의 예종은 훈신정치의 발호를 더욱 거세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왕께서는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수렴청정을 받아들이게 된 분인데요. 직접 통치하지 못하고 모후 정희왕후의 대리 통치를 받게 된 소회가 어떠신지?

"그야 말할 것 있나. 형님 의경세자가 20살의 나이로 죽고 나자 나 또한 준비없이 19살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 받았고, 부왕(세조)의 권신들이 공신이란 이름으로 떵떵거리니 왕권이란 게 어디 힘이나 쓸 수 있었겠나?

-해서 즉위 초 내린 조치가 '왕실 경호'였나요?

"그렇다네. 두려운 거지. 왕이란 자리가 힘이 있어 보이나 실은 무력(無力)하기 그지없는 경우가 허다하네. 게다가 정승들이 실질적으로 국정을 처리하는 원상제가 시행될 때 아니던가. 그나마 어머니 정희왕후가 내 바람막이가 되어 줄 수 있었지.

-열 아홉 나이에 국왕이 되어 어렸다고 하시지만, 실은 좀 뭐랄까 맘마보이 같은 면이 있던 것 아닌가요? 더구나 또래의 남이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건, 유치하다는 생각까지...

"그리 보나? 그렇다네. 내 시인하지. 헌데, 남이는 역모를 꾸몄네.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야."

-그런가요? 하지만 그건 희대의 간신 유자광의 모함 때문 아니었나요?

"왜? 조선 중기 들어서 무오사화, 갑자사화의 책임이 유자광에 있다고들 하기 때문에 남이의 역모는 사실이 아니라는 건가? 그렇지 않네!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국왕의 말을 관리하는 겸사복의 대장으로 좌천되던 날,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라고 한 말이 무엇을 의미했겠나? 역모를 꾸미고 있었던 게야. 그건 나중에 국문 중에 다 들러났던 바고."

-원인을 좀 더 제대로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왕께서는 종친인 남이가 17살에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20살의 나이에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성격도 강직하고 사내답고, 요즘 말로 훈남이라 질투가 난 것은 아닌가요? 더구나 부왕인 세조께서 특별히 사랑하자 자신의 사랑을 빼앗아 간다는 묘한 경쟁심과 시기, 열등감 같은 게 사건을 크게 만든 것 아닌가요? 즉위하자마자 병조판서직을 거두고 난데없이 말(馬) 관리 업무를 시킨다? 보복성 인사가 아니라면 그럼 뭐죠?

"권력을 놓고 만나는 관계에서는 늘 조심해야 하네. 신하는 왕의 심기를 살펴야 하는 거네. 남이는 역적죄로 죽음을 당했지만, 그게 아닌 나의 질투 때문이었다고 해도 그건 그 자신이 잘나서 부른 화일세. 어찌 왕을 탓할 수 있단 말인가?

-너무 주관적이고, 이기적인 해석인 것 같은데요.

"사랑이 문제일세. 왕의 사랑, 님의 사랑은 늘 파이가 정해져 있는데, 그걸 모두 가지려 하니 탈이 나는 거지. 보게나 나의 미움을 받아서 남이가 죽었다고 하나, 유자광 또한 서얼 출신으로 얼마나 서러움이 많았나.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우고도 부왕인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 한 것은 남이였네. 누가 이를 갈지 않겠나. 그건 남이 스스로 무덤을 판 게야. 게다가 말을 함부로 한 그 세치 혀가 유자광의 모사를 부채질한 것이고. 세상 사람들은 남이를 영웅으로 대하네만, 나는 그가 아직 덜 떨어진 젊은이에 불과했다고 보네. 정치를 몰랐던 거지.

-왕께서는 지금 '정치'를 말씀하십니까? 그렇다면 정치를 이뤄내는 판세를 잘못 읽은 것은 아닌가요?

"무슨 얘긴가? 나는 '남이, 강순의 역모 사건'을 통해 남이는 물론, 이시애의 난 이후 두각을 드러낸 강순, 조경치, 변영수, 고복로 문효량 등 적개공신들을 한방에 날려 버릴 수 있었네. 이제 나의 시대를 열 조건을 만든 셈이었지."
-그래서 왕께서는 한 수 뒤를 못 보셨다는 겁니다. 남이를 그렇게 죽음으로 몰아넣고 나서 왕께서 하신 일이 뭡니까? 부왕 때의 정란공신을 누르고 아버지 세조처럼 왕권을 강화하려 했지요? 공신세력들의 비리를 파헤치고, 관직 청탁자가 있으면 종신, 공신을 막론하고 일족까지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하셨죠? 정치판에서 닳고 닳은 한명회, 신숙주입니다. 그들이 가만히 있으려 했을까요? 어떻게 마련한 부패의 고리이자, 권력이 단 맛인데 놓겠습니까?

"말인즉, 그래서 나는 힘의 역학 관계를 유리하게 만들어내는 정치공학이 부족했다 이건가?

-그럴 수 있죠. 왕만이 아는 게 있죠? 죽을 때라야 알게 된 것.

"음... 그러네. 그날 저녁은 참으로 기이했어. 낯 시간만 해도 정사를 보고, 대비께 문안인사도 드리고 그랬었지. 그런데 내가 뭘 잘못 먹은 건지, 저녁때부터 앓아눕기 시작해 하루를 못 넘기고 이렇게 저 세상이 사람이 됐지..."

-그날 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 줄 아세요? 왕께서 승하한 바로 그날 정희왕후와 한명회가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산군을 왕으로 추대했죠. 뭔가 각본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안드세요?

"아, 그랬었군. 어머니까지...? 정치의 비정함이란... 내 이곳서 남이를 만났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네. 고백하네."

시기심 많던 단 14개월짜리 국왕 그리고 독살설. 이후의 뿌리 깊은 훈신정치의 개막. 그게 바로 조선 제 8대 왕 예종이었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의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