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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조선의 왕들

[광해군] 과연 명분으로 백성들을 살릴 수 있단 말이냐?

by 전경일 2011. 9. 14.

서자로서 임금이 된 아비 선조는 자신의 서자에게 가혹하기만 했다. 임진왜란이란 초유의 전란 중에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를 이끌면서 실질적인 국왕으로서 전란을 관리해 냈지만, 왕이 될 기회마저 박탈당할 뻔한 광해군. 선조와 더불어 역대 조선 국왕 중에 가장 긴 기간 동안 궁궐 밖에서 보냈고, 몸소 전란의 현장을 뛰었으나 그에게는 운명적으로 명분에 가로 막힌 조선이라는 현실의 벽이 가로 막고 있었다. 조선의 15대 국왕, 광해군을 만나본다.

- “하늘이 한 세대의 인재를 내는 것은 그들로서 한 세대의 임무를 완성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요즘 사대부들은 논의가 갈라져서 명목을 나누고 배척하는 데 거리낌 없으니 이제는 피차를 막론하고 어진 인재만을 거두어 시대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하리라.” 임금께서는 기억나시나요? 임금께서 즉위년에 내린 비망기인데요. 내용으로만 보면, 탕평이 이루어지고, 뭔가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 같습니다. 기대도 많이 했구요.

“그러신가? 나라의 기반이 인재들인데, 전란을 겪어 본 내가 나라를 튼튼히 하는 데 어찌 바른 인재를 쓰려 하지 않았겠나? 남인과 대북계 인물들을 중용한 것은 그 때문이지. 이원익, 이덕형, 정인홍, 이이첨 등이 그렇게 광해군 정부에 뛰어 들었지.”

-그런데 당을 넘어 참여한 ‘연립정권’이 붕괴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죠? 놀랍게도 소북파, 남인, 서인은 물론 임금께서 의지한 대신들까지 대거 역모사건에 연루되었었는데요.

“당시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대북파의 이이첨 밖에는 없었네. ‘칠서의 변’을 통해 인목대비 아버지인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제거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네.”

-그로 인해 효냐, 충이냐를 두고 훗날 인조반정의 또 하나의 불씨를 남겨 두신 건 아닌가요?

“그럴 수 있지. 허나 그땐 생황이 그랬었네. 정치란 상황이 지배하는 장 아니던가?”

-왕께서는 전란이 국가경영에 큰 경험이 되었다는 걸 알게 하는데요?

“그렇다네. 내가 대동법을 통해 국세를 단일화하고 간소화한 것은 백성들의 삶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함이었네. 여러 명목으로 갈취하는 탐관오리들의 횡행이 얼마나 백성들의 삶을 피폐케 했는가? 이를 두고 말들이 많았지. ‘대동법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느니 하며 오죽 말이 많았던가.”

-그만큼 효과도 컸다는 분석이실 텐데요, 요즘 말로 조세 정상화, 조세 정의를 실현한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까?

“그리 알아주면, 될지 않을까 싶네. 대동법은 실제 조선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매개가 되었지. 특히 경제 시스템의 변화를 가져와 상업, 수공업, 유통경제를 발달시켰고, 그게 조선 말까지 경제 근간이 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게야.”

-자 그럼, 후세가 얘기할 때 가장 비중 있게 두는 임금의 실리 외교에 대해 얘기해 볼까요? 명으로부터 임진왜란시 구원받은 조선이 명의 파병 요청에 소극적이다가 그나마 파병한 강홍립 군대가 후금군한테 투항한 이른바 ‘강홍립 투항사건’의 전말에 대해서 말씀 좀 듣고 싶은데요.

“명이 조선이 어려울 때 파병한 것은 의로운 일이었네. 나도 이를 고맙게 생각하고. 헌데, 국제 정치라는 것을 좀 살펴 볼 필요가 있네. 명이 파병한 1순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였네. 조선이 무너지면 왜가 어디로 칼끝을 겨누겠나? 전란이 남의 나라 땅에서 벌어지고 불똥이 튀지 않게 하는 게 현치(賢治) 아니던가. 명은 그 면에선 매우 현명했네. 허나 이제 조선으로서는 망해가는 명을 위해 후금과 맞설 이유가 뭐가 있는가? 전란을 조선 땅으로 불러들일 이유가 있겠는가? 정치적 결단은 명분이 아닌, 실리에 기초해야 하네. 어디 분으로따지면이야 내가 임란이 끝난 10년 후에 원수 같던 왜와 기유조약을 맺어 국교를 재개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강홍립 투항사건은 대의도 지키며 형세의 향배에 따라 국익을 먼저 지키고자 한 전략적 판단에서 나온 조처였네.”

-하지만 그게 훗날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능양군(인조)이 들어서고 나서 반청 정책을 취해 우리가 얻은 게 뭔가? 가까스로 전란의 상처를 치유해 가는 시점, 정묘, 병자 양대 호란을 겪으며 백성들만 죽어나지 않았던가? 능양군도 결국 삼전도에서 치욕을 치르게 되고. 정치란 실리를 명분으로 감싸 안는 것이네. 역사적 판단이 잘못되면, 그 후과가 너무 크다는 점을 잘 알아야 해.”

-국제정세에도 뛰어나셨지만, 그런데 왜 내부적으로는 반란의 낌새를 눈치 채고 대비치 못하셨던 거죠? 명분론자들의 반격이 있을 것이라 예상치 못했었나요? 게다가 능양군은 동생 능창군이 1615년 반란 사건에 연루돼 죽자 이를 갈고 있었는데요.

“국가는 국왕이 경영을 잘 못해서 무너지는 게 아니네. 전란의 후과가 너무 컸지. 파병을 했어도 명은 무너졌지만, 그로 인한 조선의 민생 경제 피폐는 나 광해의 몰락을 가져온 거네. 게다가 내가 균형감각을 잃은 것도 주효했고.”

-그것이 반정의 싹이 트고, 성공한 이유군요?

“그렇다네. 내 반정을 못 막았으나, 반정 세력도 전 정권이 한 일을 전무 무시하며 국정을 운영하는 통에 국란을 자초했으니 눈못뜬 청맹과니가 이를 두고 말함이지. 내 이를 한탄하는 것이네.”

국왕으로서 몸소 임란을 이끌고, 대동법과 실리외교를 통해 조선을 구한 광해군. 그러나 그는 내부의 모순을 헤아리고 관리하는 역량 부족으로 정묘와 병자년의 호란을 불러들이는 구원(久遠)의 단초를 제공했으니, 경영이란 어느 한 면만 볼 게 아니라 두루 살펴 보야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해서 경영을 ‘계속되는 고민(going concern)’이라고 하는지 모른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의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