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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이순신 |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이순신](전경일 소장) 임박한 전란과 준비역량

by 전경일 2011. 10. 31.

고향으로 내려온 이순신은 45세 되던 해 1월 다시 나라의 부름을 받는다. 조정에서 임진왜란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준비하려는 것과 북방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으로 ‘불차탁용(不次擢用)’을 한 것이다. 불차탁용이란, 쓸 만한 무신을 특별히 관직의 서열을 밟지 않고 천거해 채용하는 것을 말한다. 당시 이순신은 북방지역의 전공으로 서열 2위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는 천거되지 않았다. 대신 전라감사 이광의 군관으로 임명된 후 조방장을 겸임하게 된다. 이후 잠시 선전관으로 재직하다가 유성룡의 추천으로 정읍현감에 임명된다. 정읍현감은 이순신이 쌓아가는 경험 중 대단히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그 무렵 정읍 현감 직을 수행하며 장군이 터득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이순신은 치민(治民)의 명성을 얻게 된다. 백성을 다스리는데 그 대상인 백성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 경험은 훗날 임진왜란이 터지며 왜적과 맞서 싸우는 전시 상황에서 중요한 현장 경험치로 작용한다. 이듬 해 이순신은 북방 방어를 위해 고사리, 만포진 첨사에 거듭 임명된다. 그러나 승진이 너무 빠르다는 대간들의 반대로 정읍현감 자리에 그대로 유임된다. 이 일은 오히려 훗날 왜를 막는 방어 전지(戰地)로써 전라도에 대한 보다 풍부한 경험을 쌓는 계기가 된다. 개인의 입신기회는 줄었으나, 나라의 운명으로써는 극히 다행스러운 결과였다.  

1591년(선조 24년) 2월 들어 이순신은 진도군수에 임명되었다가 특진되어 전라좌수사로 발탁된다. 무려 여섯 품계를 뛰어넘은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요즘 기업의 직급과 비교해 보면 부장급에서 전무급으로 일약 발탁 승진된 셈이다. 이런 파격적인 승진에 대해 반대가 극심했으나 조정에서는 당시 전라좌수사로 있던 이유의(李由義)가 무능하다는 점을 알고 있어서 새로운 인재 수혈이 시급한 때였다. 종6품 현감에서 정3품 수사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되는 것은 서애 유성룡의 추천에 의한 것이지만, 당시 조정도 왜의 침입이 임박해 있다는 점을 인식한 까닭에 대비책을 세우고자 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조정은 비록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던 황윤길과 김성일 간의 보고가 당리당략에 진실이 가려지며 만전의 대책을 기할 수 없었지만, 나름 변방 사정에 밝은 인물을 배치하고, 영·호남 요충지의 방어시설을 보수하기 시작했다. 또한 경험 있는 유능한 장수를 찾았다. 이 같은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이 작은 출발과 강직함으로 조직생활에서 크게 시련을 겪었던 이순신을 전격 역사의 무대에 불러낸 것이다. 사간원의 반대를 뒤로하고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것은 이 같은 현실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 이 자리는 원균이 임명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원균은 수령으로 있을 때 근무성적이 하(下)여서 반년도 못돼 수사가 되는 것을 사간원에서 극력 반대해 이순신에게 차례가 돌아온 것이다. 이때의 인사로 원균은 전라좌수사직 대신 부령부사(富寧府使, 종3품)직으로 승진발령 받아 간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만약 이때 원균이 전라좌수사에 부임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임진왜란의 전개 방식은 사뭇 달랐을 것이다.

이순신에게 첫 수사 자리를 내준 원균은 자신의 정치적 배경인 서인의 윤근수, 윤두수의 힘을 얻어 임란이 일어나기 불과 2개월 전 전격 경상우수사가 된다. 이순신보다 수사 부임이 1년이나 늦었던 원균이 수사직을 수행하는데 자격의 적격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뒤늦은 발령으로 그가 현지적응 및 전쟁 준비기간에 있어 이순신보다 불리했을 것은 자명하다. 이때는 임란 발발 1년 2개월 전의 일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가까스로 1년여의 전쟁 준비기간을 갖게 된다.


[조직 내 위기관리 역량과 커뮤니케이션 문제]

조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90년(선조23년) 3월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한다. 이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전쟁 준비를 위해 작전군을 편성하고 후방보급망을 구성한 때였다. 조선은 통신사로 정사 첨지 황윤길(黃允吉), 부사 사성 김성일(金誠一), 서장관 전적 허성(許筬)과 수행원 200여명을 파견했는데, 왜의 사신 히라요시(平義智)가 이들을 대동하여 대마도를 거쳐 오사카(大阪)로 가서 일본 관백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난다. 당시 히데요시는 ‘정명향도(征明嚮導)’를 명하였는데 대마도의 소오 요시토토(宗義調)의 아들 요시토모((宗義智)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것을 ‘가도입명(假道入明)’으로 바꾸어 선조에게 간절히 청한다는 내용으로 바꾸어 버린다. 통신사는 이듬해 3월에 귀국해 왜의 정세에 대해 자세히 보고했는데, 이 때 서인에 속한 황윤길은 “필히 병화가 있을 것이니 내침에 대비하여야 한다”고 보고하였고, 동인인 김성일은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난다”며 상반된 보고를 했다. 선조가 “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하고 물으니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다”고 하였고,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았는데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된다”고 답하였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에 선조는 주청사 한응인(韓應寅)을 명나라에 파견해 통신사의 보고를 바로 상주하였고, 한편 김성일의 말을 지지하여 앞서 내렸던 방위 명령마저 철회하고, 히데요시의 서계가 단순히 위협을 가하는 것이라 해석하여 예(禮)로서 설유, 위무하는 방책을 취하기로 하는 등 정세 판단력의 한계를 보인다.

이 때 유성룡은 김성일을 만나, “그대가 말한 것이 황윤길과 다르니, 만일 왜군이 실지로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물으니, 김성일이 “나도 어떻게 왜군이 끝끝내 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야 있겠는가.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꼭 왜놈들이 우리 사신들의 뒤를 바로 쫓아오는 것 같아 인심이 흉흉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유성룡은 공석인 전라수사로 이순신을 추천하고, 경상우병사로 이일(李鎰)을, 의주목사로 형조정랑 권율을 발탁하여 전쟁에 대비케 한다. 막상 전쟁이 터지자, 김성일은 전일의 복명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었으나, 유성룡 등의 변호로 늙고 병든 조대근을 대신해 경상도우병사로 부임한다. 전쟁 발발 시 현장 지휘관이 교체된 것이다. 그는 이때에도 다시 한 번 조정에 잘못된 보고서를 올려 논란을 가중시키는데, ‘적선은 400여 척에 불과하고 군사 수십 명을 태웠으니 모두 1만 명을 넘지 못한다’는 부정확한 보고가 바로 그것이었다. 반면, 황윤길은 대조적으로 임란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관직을 받지 못했고, 이후 병조판서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시호도 없고, 사망 일시조차 알 수 없다. 국란에 임해서도 자기 사람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던 당시 당쟁의 폐해가 얼마나 컸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 조직에도 이와 같이 왜곡된 인사관리 체계와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카인즈교육그룹,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이순신,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