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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이순신 |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상시적 대비책으로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하라

by 전경일 2011. 11. 15.

상시적 대비책으로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하라

1592년 4월 13일 오후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적은 이튿날인 14일 부산진을 점령하고, 15일 동래부를 함락시킨다. 5월 3일에는 서울을, 28일에는 임진강을 건너 6월 15일에는 평양을 점령한다. 부산을 치기 시작해 개전 20일 만에 서울이 무참히 무너지고, 2개월 만에 개성, 평양까지 빼앗기는 등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된 것이다. 일일 평균 26km의 놀라운 속도로 적이 북상한 셈이니 특별한 저항 없이 통과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임란 초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이렇다 할 방어 없이 밀리게 된 것일까? 임란 전 전쟁 발발을 두고 조정 내부에서는 이견과 혼란은 있었으나, 나름 전쟁에 대한 대비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589년 1월 조정에서는 불차탁용으로 이순신을 비롯해 무신들을 천거하기도 했으니 난의 낌새를 못 챘을 리 없다. 문제는 다른데 있다. 국방 시스템이 큰 몫을 차지한다. 임란에 임한 당시 우리 수군의 편성과 조직적 역량은 어떠했을까? 혹시 방어 시스템상의 문제점은 없었을까?


임란 당시 전라좌수군은 전라좌수사-우후-사도첨사-만호의 지휘체계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순신이 맡은 전라좌수영의 관할지역은 해남반도 남단을 경계로 그 동쪽 지역의 전라도 해안이었다.

임란 당시 조선의 수군 조직을 살펴보면, 해안지역은 수사의 관할권 하에 들어가 있었고, 육지의 수령인 도호부사, 군수, 현감 등도 수사가 관할하게 되어 있다. 육지의 행정구역과 수군의 행정구역은 서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전투가 발발하면 상호 유기적인 협조 하에 작전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각 관의 부사, 군수, 현감과 각 진포의 첨사, 만호 등은 평상시에는 백성을 다스리다가도 유사시에 전라좌수사의 명령이 떨어지면 각 관, 진포의 선소(船所)에 보유한 전선과 필요 인원을 이끌고 나가 관할 해역을 방위했다. 이들은 전라좌수영에 집결해 좌수사의 지시를 받게 된다. 임란 초 전라좌도는 5관(본영, 순천, 광양, 낙안, 보성, 흥양)과 5포(방답, 여도, 사도, 발포, 녹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유한 배도 판옥선, 하우선, 귀선(거북선)이 각각 18척, 18척, 2척과 12척, 12척, 1척으로 전체 30척, 30척, 3척 등 총 63척이었다.


장점이 단점이 되는 군사동원 체계

임란 전 지방군의 편성 방법은 전국 행정 단위인 읍(邑)을 동시에 군사단위인 진(鎭)으로 편성한 진관 체계였다. 따라서 수령으로 하여금 군사지휘관 역할도 맡게 했다. 이런 진관 체계에는 장점도 있다. 적이 쳐들어오면 우선 수군이 막고, 수군이 뚫리면 1차 방어선으로 진관이 격퇴하고, 진관이 무너지면 다음 진관이 적을 방어하는데 시간을 벌며 인근 진관과 중앙으로부터 후원군이 도착해 방어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차적으로는 해당 지역에 외적이 쳐들어오면 자체적으로 방위하는 자전자수(自戰自守)의 방비책이었다. 연안에 빈번히 출현하던 왜구를 해당 지역이 자체적으로 책임지고 격퇴하도록 되어 있는 자기 책임제였다.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진관 체계다보니 자기 책임 관할구역을 벗어나서는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구역을 벗어나 작전을 수행하려면 조정의 공식적인 명령이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소규모 왜구 침략을 막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지만, 대규모 전쟁 사태에는 맞지 않았다. 전쟁 초기 이순신이 경상도로 병력을 이동시키지 못한 것은 이 같은 진관 체계가 크게 한 몫 한다. 일테면 매뉴얼에 발목 잡혀 초기 왜구 격퇴 시기를 놓쳐 버린 셈이다.

오늘날 기업 경영의 필수요소는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신속히 적응하는 유연성이다. 과거처럼 정해진 공식으로 대응할 만큼 문제가 단순하지도 않다. 또 위기가 예고하고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기존의 장점은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단점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된다. 요는 이를 실행하는 현장 지휘자의 자세와 판단력이다.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대처하려면 조직에는 유연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경영에서 권한위임이라든가, 소통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순신이 모든 함대를 이끌고 첫 출전하게 된 것은 조정의 출전명령서가 도착한 1592년 4월 27일 이후 3일이 지난 30일 새벽이었다. 이때 새벽 출정을 한 것은 하루 시간을 온전히 쓸 수 있어 시간 사용의 효율성이 증대됐기 때문이다. 장군은 이때서야 판옥선 24척, 협선 15척에 전선으로 위장한 포작선(어선) 46척을 이끌고 저 어둠의 바다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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