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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조선의 왕들

[효종] 실행력이 부족한, 혹은 실행할 수 없는 자의 안타까움

by 전경일 2011. 11. 25.

형 소현세자와 동생 봉림대군은 달랐다. 달랐기에 다른 길을 가고자 했던 것인지, 형을 밀어내고 왕으로 추대되었기에 형과 다른 길을 걸어야 했던 것인지 의문은 남는다. 그의 아버지 인조의 바람대로 심양에 머물 때 형과 달리 소무(蘇武)처럼 행동한 그였기에 명분만 내세웠던 인조의 눈에 들었는지 모르겠다. 조선의 17대 국왕 효종의 미완의 북벌을 만나본다.

-형님과 여러 면에서 달랐다는 점이 왕의 차이 일 텐데요. 소현세자가 친청(親淸) 정책을 통해 실제에 기반한 정치를 펼치려 했다면 왕께서는 부친인 인조와 같은 정치적 입장을 보이시는데요? 우선 정치적 배경부터 살펴보시죠?

“심양에 있을 때 나와 형은 완전히 다른 입장이었지. 형님은 나날이 강성해 가는 청을 보며 여기서 배울 게 많다, 우리 조선도 청을 통해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했지. 허나 내 생각을 달랐네. 나는 청이 끝내 명나라를 먹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네. 천하의 중국 아니던가? 청이 아무리 욱일승천의 기세로 일어난다고 해도 명은 역시 대국 아닌가 말일세. 삼전도에서 부왕께서 당한 치욕을 민족적 수치로 알고 나는 절치부심했네. 형님은 뜻을 좋았지만, 초심을 잃었어.”

-그게 소현세자가 죽어야 할 이유였나요?

“현실 정치라는 걸 알아야지. 혼자 개혁할 수 있는가? 형님은 사면초가였네. 반면 나는 부왕과 서인들이 밀고 있었네. 왜 개혁을 보다 본질적인 데 쏟아 부으면 안되나?”

-본질이요? 왕의 북벌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나는 청의 빈틈을 타 북벌을 이룸으로써 치욕을 갚고자 했네. 내가 1649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반청주의자였던 김집을 이조판서로 임명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어.”

-그로 인해 그의 제자였던 송시열, 송준길이 대거 조정에 들어오게 된 것이군요?

“그렇지. 새롭게 효종 정부를 구성한 것이지. 그들이 조정에 들어오자마자 친청파인 김자점을 몰아내게 했지. 그런데 세상은 아이러니한 게 김자점이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30년 권력을 움켜쥐었으니 부왕과는 인연이 깊다 하겠고, 또 친청파였으니 형님인 소현세자와도 가까워야 하는데, 오히려 후궁 조소용과 밀착해 형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주역 중 하나였으니 권력이란 게 얼마나 시류 따라 흐르는 것인가? 정치적 계산만 있지, 지조나 의리 같은 게 있기나 한가 말인가?

-하하. 그런 말씀은 송시열에게도 해당되는 것 아닌가요?

“그건 좀 복잡하네. 조소용의 맏아들인 숭선군을 추대한 김자점 역모 사건이 해결되고 나서 김집-송시열 대(對) 김육 등으로 대표되는 양당 구조로 정치 지형도가 변했네. 산당(山黨)과 한당(漢黨)이 그것이지. 그런데 말일세, 산당은 이이의 학통을 이어받았지만 실질 정치에서는 개혁과 민생 따위엔 큰 관심이 없었지. 오히려 한당이 정국을 보다 진보적으로 이끌어 갔지. 송시열이 나의 북벌론에 동참하는 듯한 제스츄어를 보인 것은 속으로는 불가능함을 알았으면서도 주자학적 원칙주의를 맹신했기에 취해진 행동이었을 게야. 명분만 내세우며 자신의 기득권이나 지키려 했던 거지. 반면, 한당은 민생 안정을 위해 대동법이라든가, 뭔가 실질적인 도움을 줬지. 그런데도 나는 송시열에게 끌렸으니.

-송시열이 북벌을 지지했다면 실행해서 성공할 수는 있었을까요?

“나도 그런 장담하지 못하네. 내가 북벌을 위해 구상한 시나리오 중 10만 정예 기병론이 있네. 아직 청이 중원을 완전 지배한 게 아니기 때문에 조선에서 밀고 올라가면 한족들이 호응해서 청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더구나 제주도에 하멜이 표류해 그를 통해 신식 조총을 제작케 하였으니 군비(軍備)에서도 앞섰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말이네. 우리가 갖춘 경쟁력이 청을 치는 데 쓰인 게 아니라 외려 청을 도와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나선정벌에 쓰였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네.”

-결국 북벌의 기회는 안 온 거군요?

“그런 셈이네. 생각해 보면 그건 현실 자체이기도 했고, 때를 마냥 기다리기만 한 나의 실행력 부족이 가져온 결과기기도 했을 거네.”

-그래서 왕이 된 이유도 그렇고, 형과 차별화를 이뤄야 하는 부담감도 있고 해서 조바심이 났었겠군요.

“내가 1658년(효종 9년) 북벌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하에 강행하고자 한 건 그때문이네.”

-그때 왕의 북벌 파트너였던 송시열은 어떤 입장을 보이던가요?

“겉으론 동의하지만 속으론 밍기적거렸지. 어떻게하면 북벌을 유야무야시킬까 그 생각만 하고.”

-그래서 왕께서는 더 채근했고, 최종적으로 이듬해 송시열과 단독 대담을 하게 된 것이군요? 결국 두 사람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그 후 두 달이 못가 왕께선 독살된 것처럼 갑자기 죽었으니까요.

“그렇지! 그건 그들의 짓이었을 게야. 말만 앞서다 끝내 행동에서는 표리부동했던. 그건 내 자신도 마찬가지일거구...

형인 소현세자를 대신해 왕위에 오르며 북벌을 이뤄내려던 효종, 그러나 그는 명분론자들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하고 끝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오늘날 조직에서 말뿐이지 실행력 없는 논의는 끝내 조직을 침몰시킨다는 것을 효종의 북벌 사례에서 알 수 있지 않을까?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 <이순신,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