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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조선의 왕들

[현종] 무효경쟁으로 세월을 허비하니 정치의 본질은 실종되고

by 전경일 2011. 11. 25.

19세의 현종은 북벌을 강행하려 했던 아버지 효종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왕위에 오른다. 독살설이 끊이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효종의 죽음은 그 죽음의 미스터리 한가운데 있던 송시열과 산당의 존재가 있는 한, 현종 자신에도 닥칠 불행한 운명의 전주곡과도 같은 것이었다. 즉위기간 내내 왕실의 의례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조정은 날을 밝히고 있었고, 거기에 정치의 본질인 민생이 자리 잡을 곳은 없었다. 조선의 18대 국왕 현종을 만나본다.

-왕께서는 재위 15년 동안 ‘상복을 어떻게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날을 세우다 시피하셨는데요. 정치의 근본이 그보다는 민생에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어디 이르다 뿐인가. 허나 예송논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네. 인조반정 이후 호란과 북벌이란 키워드가 부왕의 급사로 일단락되자 현실에서 실천할 수 없는 주장을 하던 무리들은 관념적 세계에라도 뛰어들어 한껏 목청을 올려야 그나마 숨통이 터지는 맛을 보았을 것일세. 얼마간 상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의례 차원이라기보다 송시열·송준길과 허목·윤휴 등의 정치적 다툼으로 보는 게 맞지.”

-북벌은 논의만 분분한 채 끝나고 실질을 구하지 못했는데, 정벌 논쟁을 하다가 효종 사후 한 달이 못돼 전부 예법논쟁으로 국가적 관심사가 다 바뀌었다? 이거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렇다네. 조선이 기울어가는 구체적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거지. 송자(宋子)라 자타칭 하던 송시열은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 격이었지. 북벌을 무력화했고, 부왕의 죽음에도 깊숙이 간여했을 것으로 보인 그가 이제 북벌이란 명분의 키워드와 예법이란 관념을 두 축으로 권력을 누리며 왕을 능멸하려 하였으니 말이네.”

-북벌을 가로 막았지만, 북벌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고 북벌을 여전히 권력 기반으로 삼았다는 겁니까? 북벌 실천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는 자가 말입니까?

“그의 정치력이 그 정도였네. 교묘히 꾸미는 말로 현실을 농락했지. 심지어는 나를 왕으로보려고도 하지 않았네. 그의 방약무인한 태도가 중국에까지 소문이 나서 조사단이 파견될올 정도였으니. 표리부동한 학자의 표본이라 할 수 있지.”

-그런 그가 정국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왕권 약화가 가져온 결과였나요?

“그렇지. 왕의 권력이 신하들의 반정에 의해 이루어진 과거 경험은 신권 중심으로 정국이 흘러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지.”

-예송논쟁에 대해 좀 말씀을 듣고 싶은데요.

“내 즉위년에 부왕의 붕어를 두고 자의대비께서 상복을 입는 게 3년이 옳으냐 1년이 옳으냐 하는 논쟁이 있었지(기해논쟁). 부왕 효종께서 차남이었으니 1년 상복으로 해야 한다는 송시열의 주장은 부왕의 정통성을 흔드는 것이었네만, 나는 이를 바로 잡을 수 없었지. 내가 그와 맞서게 되는 것은 15년 후 인선왕후께서 승하하자, 다시 자의대비께서 며느리 상에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였지. 송시열류의 서인들은 처음에는 1년을 말하다가 나중에는 기해년 때 주장과 앞뒤가 맞지 않자 9개월로 바꿨지. 나는 이때를 기다려왔네.”

-그럼 왕께서는 오랜 기간 동안 송시열과 맞서기 위해 준비하고 계셨던 거군요?

“그런 셈이지. 그때는 나도 정치적 경륜이 한 단계 성큼 올랐을 때이고 해서, 서인의 주장을 공격하는 남인의 상소가 올라오자 기해 예송 당시의 모든 상소와 의례를 검토해 서인들을 몰아 붙였지. ‘너희들이 송시열의 말은 중하고 임금의 말은 가볍다는 것이냐?”고 추궁하고, 서인의 영수 김수항을 귀향 보내는 한편, 남인 중심으로 정권 교체를 시작했지. 인종 반정 이후 50년 서인 집권이 끝나려는 찰라였네. 그런데 말야. 1674년 8월 나는 갑자기 운명을 달리하게 되며 이 싸움을 마무리 짓지 못하게 되었지.”

-그 죽음엔 역시 서인들의 음모가 있었던 건가요? 효종의 독살설처럼 말입니다. 결국 왕께서 풀지 못한 숙제는 다음왕인 14세 어린 아들 순(숙종)에게로 넘어가는 거군요?

“그런 셈이지. 그런데 순이 어린 나이에 예상 외로 잘하더군.”

-그런데 말입니다. 예송 논쟁 그 너머에 있을 정치의 본질인 민생문제는 임금이나 신하 사이에서 증발해 버린 것 같던데요. 일테면 인사이더들끼리의 리그전만 치루신 것 같고요.

“그렇기도 하지. 헌데 당시엔 그럴 수밖에 없었네. 호란을 겪으며 무기력해진 심적 보상을 명분에서나마 찾으려는 경향이 팽배했기 때문이네. 장자 중심이라든가, 장례, 예법, 족보 따위에 목을 매듯 하는 경향은 다 그런 것의 반영이었지.”

-그 결과 조선은 반성의 기회를 놓친 채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구요.

“음...”

현종 시기, 조선은 양대 호란을 겪으면서도 안으로 철저한 반성 없이 명분론만 내세운 서인과 왕권에 무기력했던 왕 자신에 의해 무효경쟁의 당쟁 시기로 접어든다. 훗날 이런 반성은 실학으로 나타난다. 실제는 없고, 말만 풍성한 조직에는 언제나 안으로 곪는 퇴행적 태도가 만연한다. 송시열과 서인들이 보여준 모습은 실천력 없는 권력 쟁투를 위한 사내정치의 극단을 보여준다. 그러 인해 가장 큰 폐해를 보는 사람은 당대를 살아가는 백성들이다. 민생이란 키워드가 설 곳이 없기 때문이다. 조직 내 의미 없는 논란이 어떤 폐해를 가져오는지 현종 무렵 예송 논쟁은 충분한 반면교사가 되지 않을까?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 <이순신, 경제전쟁에 승리하라>의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