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15년 11월 19일부터 21일까지. 그리고 세종 21년 8월 6일은 그야말로 숨막히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하에 세종이란 한 나라의 CEO가 얼마나 스피디한 의사 결정과 전략 수행 그리고 기회를 잡는 순간 포착력을 보여줬는지 잘 보여주는 우리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름하여 4군 6진 영토 회복 작전.
이때 나라의 지금 경계가 확보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만주는 원래 고구려 영토요,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발해에 속하여 2백년 동안이나 나라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흔히 만족족, 다시말해 여진족이란 고구려에 속해 있던 말갈의 후예로 우리와 같은 계통의 민족이었으나, 두 제국이 무너진 다음엔 완전히 다른 민족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국토를 두만강과 압록강 안으로 보려는 그릇된 역사관은 바로 식민 사관의 잔재임은 물론이거니와, 나아가 대륙을 도모하던 민족의 기상을 상실한 사대와 지극히 작은 것에서 기득권을 구하고자 하는 무리들에 의해 나라 기상이 능멸되어 왔기 때문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이러한 여진족이라 해도 오랜 기간 야인으로 살다보니 조선과 형제의 관계는 있다해도 실질적으로 강자 편에 서는 건은 당연. 더구나 생필품 자체를 외부에서 조달해야 하는 악조건하에 여진은 명과 조선의 국경을 넘나들며 약탈사업으로 부족경제가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 역사상 국토 확장의 의지와 시도는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고려 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기위한 북진정책으로 국토를 청천강과 영흥지방까지 확장하였고, 성종은 의주까지 넓혔으며, 현종은 압록강 입구 의주로부터 동해안 장평군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쌓았으며, 예종때에는 윤관을 보내 9성을 쌓아 두만강 북쪽 7백리 밖 선춘령에 이르러 공험진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금나라의 흥기로 9성을 반환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가 공민왕에 이르러서는 원나라가 쇠퇴하는 틈을 타 민족의 최대 염원인 고구려 땅을 회복하기 위해 요동 팔참을 점령하고 만주방면으로 진출하려 하였다. 이때 공민왕의 초대형 고토 회복 국책 프로젝트는 원나라를 대신해 일어난 명에 의해 좌절되며, 대고구려 국토 회복보다는 동북면 쌍성지방으로 눈길을 돌리게 만든었던 것이다. 실로 결정적인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이때 태조 이성계는 고조부 때부터 바로 동북면 여진 땅에 거주하다 역사적인 창업의 기회를 거머 쥐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동북면 땅은 ‘왕이 일어난 땅’이라 하여 후대 조선의 CEO 들에게 꼭 지켜야할 성스런 땅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용비어천가』에 ‘흥왕지지(興王之地)’라고 하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민족적 염원과 숙원을 세종이 모를 리 있겠는가? 세종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이런 애기를 듣으며 자라났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동북면에 갑자기 변화가 일었다.
극동의 힘이 명으로 향하자 조선을 형제의 예로 다하던 여진족의 태도가 일 순간 급변했던 것이다. 사실 이때의 여진의 패권을 놓치게 되었던 것은 명의 온갖 외교적, 정치적 성과라 볼 수 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다시 얘기해 보기로 하자.)
여진은 명의 힘을 빌어 조선의 명령에 따르지 않아, 조선에서는 경제 압박조치(지금의 금수조치, 즉 embargo)의 일환으로 무역장을 폐쇠하는 등 조치를 취한다. 따라서 여진족은 소금과 쇠 그리고 생필품을 구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해 자주 조선 국경을 침입하게 된다. 그후 여진과의 크고 작은 규모의 전투가 지속적으로 벌어지자, 정부로써는 이 문제가 여간 골치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무렵 곽승우의 패전을 계기로 태종은 아예 경원부를 경성으로 옮겨 방어 전략을 취하고자 했다. 그러나 잦은 침입이 있자 세종 7년 이래 조정에서는 경원부를 용성으로 물리자는 퇴배론(退排論)이 강력히 대두되었다. 나라의 땅을 줄이려는 작은 생각들이 팽배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국토에 관한 한치도 물러 설 수 없다는 굳건한 입장을 취해 이를 찬성하지 않았다.
“나는 나라의 땅을 줄일 수 없다.” 세종이 한 말이다.
김효원이 경원 비장을 둘러보고 돌아 와 보고한 퇴배론(退排論)을 물리치고 세종은 오히려 방어지를 전진시키려는 적극적 태도로 여러 해 동안 전략적 검토를 하게 된다.
그런데 마침내 절호의 기회가 왔던 것이다.
바로 세종 15년에 이 지역 야인들 사이에 내란이 일어나며 자중지란에 빠져 건주좌위도독 동 맹가첩목아를 살해 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특보가 서울에 도달한 것은 10월 29일. 세종은 오랬동안 절치부심 기다려왔던 국토 확장 계획이 천시(天時, 즉 때)를 만났음을 직감하고 고토 수복을 결심하고 긴급 국가안전 보장회의를 소집한다. 이때 급한 부름을 받고 참석한 이들이 바로 황희, 맹사성, 권진, 하경복, 심도원 등인 것이다.(전략적 기회 포착과 세종의 국토 회복 의지에 온 마음으로 동참해 준 이들 충신들의 이름을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아무하는 본래 우리 나라 경내인데, 혹 범찰 등이 딴 곳으로 옮겨가고 또 강적(强敵)이 있어서 아무하에 와서 살게 되면 우리 나라의 변경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강적이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옛 강토를 회복하여서 조종(祖宗)의 뜻을 잇고자 하는데 그대들 생각은 어떠한가?”
세종은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날이 11월 19일. 바로 이틀 후에 세종은 병조에 긴급 타전으로 교지를 내려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경과 결심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두만강 북계(北界)는 하늘이 만들고 땅이 베푼 험고(險固)한 땅이다...이제 저 소다로와 공주가 거칠은 풀밭이 되었으며, 오랑캐의 기마가 제멋대로 밟고 사냥하는 마당이 되었으니, 내가 이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태조 때 맹가첩목아가 순종하여 와서 우리 나라의 번리(藩籬, 울타리)가 되기를 청하매, 태조께서 사방의 오랑캐를 지켜준다는 생각에서 잠시 허락하였던 것인데, 이제 그들이 스스로 멸망하여 번리가 텅 비게 되었으니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릴 수 없다...너희 병조는 마땅히 이 뜻을 본받아 반드시 행하여야 할 것이다.”
바로 이 날 세종은 역사상 두만강 이내의 모든 영토를 원샷에 회복할 결정적인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 세종의 두 눈에는 나라의 명운에 대한 너무나도 간절한 바램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스스로 고구려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뼛속 깊이 자각한 것이었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
(다음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