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경영/조선의 왕들

[경종] 복수로 살지 아니하고 형제의 의를 다하라

by 전경일 2011. 12. 7.

재위기간 4년. 아버지 숙종으로부터 생모인 장희빈에 대한 사랑이 식자, “누구의 자식인데 그렇지 않겠는가?”라며 멸시까지 받았던 조선의 제 20대 임금, 경종. 그는 당쟁의 결과로 왕위에 오르고 당쟁의 결과로 독살되었다는 의문을 남긴 채 짧은 한 인생을 마감했다. 재위 동안 노론과 소론의 당쟁의 절정기를 보낸 국왕을 만나본다.

-왕께서는 부왕(숙종)이 정말 힘들게 얻은 아들이지요?

“그렇다네. 부왕께서 즉위한지 14년 만에 본 아들이니 오죽 애지중지 했겠나. 태어나 3개월 만에 원자로 책봉되고, 3세가 되자 왕세자로 책봉될 만큼 관심을 많이 받았었지.”

-그런데 부왕이 아버지로서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을 하며 아들을 부정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나요?

“어머니(장희빈)에 대한 애정이 식자, 그 아들마저 싫어진 거지. 아버지가 워낙 변덕이 심하지 않았던가.”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임금께서는 생애 무엇이 가장 어렵던가요?

“음-. 권력의 속성이랄까, 군주로서 처신의 문제라고나 할까? 나는 말일세. 원한을 원한으로 갚고자 하지 않았네. 세상을 살며 원한대로 산다면 살아남을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내 생모가 중전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나, 숙빈 최씨에 의해 사약을 받게 된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네. 그렇다고 어찌 이복 동생인 연잉군(숙빈 최씨 소생, 훗날 영조)을 죽일 수 있었겠나? 노론들이 온갖 말 못할 전횡을 일삼으며 나를 압박하였지만, 나는 오히려 형제를 감싸주었지.”

-당시 정국은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는데요. 상황이 어땠나요?

“노론? 송시열의 추종자들이지. 그들은 문자에 얽매어 정치가 민생을 돌보는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네. 부왕이 노론, 소론간 싸움에서 노론의 손을 들어준 뒤로 소론은 대거 실각했었지. 그들은 내가 그들이 사사토록 한 장희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왕으로 인정하려 들지도 않았네. 권력에서 밀려날까 봐 불안했던 게지. 그때 ‘윤지술 사건’이 일어난 거네.”

-그 사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요?

“1720년이었네. 노론의 윤지술이 ‘숙종의 행장에서 신사처분과 병신처분이 애매하게 표시되어 있다’며 상소를 올렸지. 즉 생모 장희빈을 내쫓아 사사시키고, 소론을 내쫓은 것이 정당하다며 나보러 인정하라고 한 것이지. 나는 윤지술에게 어떤 죄도 물을 수 없었네. 노론 세상 아니던가. 오히려 ‘희빈 강씨를 추승하자’는 소론계 유생 조승우를 사사시키는 것으로 끝맺었지.”

-생모의 죽음에 대해 오히려 노론 입장을 두둔한 거군요?

“음, 그랬네. 그러자, 이들은 연잉군을 왕세자로 책봉해 달라는 요구를 해서 나에게 왕세제 책봉에 대한 수락까지 받아내고, 왕실 최고 어른인 대비 인원왕후로부터 수결까지 받아낸 거네. 한술 더 떠 왕세제가 대리청정 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나를 끝까지 밀어 붙였지. 어디 그뿐인가? 조정의 정책을 결정할 때, 세제가 참석하여 가부를 결정하자고 요구하고 나섰기도 했지. 너무 갔던 거네. 더는 참을 수 없었지.”

-그것이 노론에서 소론으로 권력 지형도가 바뀌게 된 이유군요?

“그렇다네. 김일경 등 소론의 급진파들이 상소를 올리자, 나는 때가 왔음을 알았네. 때마침 남인계 서출 출신인 목호룡이 노론 명문가 자제들이 주도하는 국왕 시해 역모사건을 고변하자, 노론께 주동자들을 잡아 역적으로 몰아 사사 시켰네. 노론으로서는 쑥대밭이 된 거지. 듣자니 이야기에 의하면 이들이 나를 삼급수로 죽이려 했다니, 자객을 보내거나, 독약을 타 먹이거나, 유언을 위조하는 방식으로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네. 이들의 이런 역모로 인해 훗날 내가 죽고 나서 독살설이 불거지게 된 거네.”

-그럼 왕께서는 정말 독살되신 건가요?

“내 시신을 보니 어떻든가? 그 애긴 이쯤 해두겠네.”

-다시 연잉군으로 돌아가면요, 왕좌를 넘보는데 제거하고 싶지는 않으셨나요?

“내 앞서 말하지 않았던가. 형제간에 피를 보는 일을 내 어찌 하겠는가? 게다가 내 슬하에 아들이 없으니, 선의왕후의 뜻대로 소현세자의 후손인 밀풍군의 아들 관석을 입양해 왕위를 넘겨주는 것이나, 연잉군에게 돌아가는 것이나 뭐 그리 다르겠는가? 생각해 보면, 연잉군(후에 영조)를 내세운 건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었지. 영조 재임 기 국정을 보면 잘 알 수 있지 않겠나.”

-최씨로 말미암아 생모가 돌아가셨는데, 복수대신 용서를 하는 건 한 인간으로서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요?

“그랬지... 그래서 결자해지 되었으면 됐지 않나. 누가 빚은 업이든...”

조선의 20대 국왕 경종, 그는 복수의 칼날 대신 화해와 용서의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영정조기 치세를 열어 가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임금 아닐까? 해서 경영자들은 현실에서 겪게 되는 갈등을 대화해로 감싸 안을 도량을 갖춰야 할지니, 그게 경영자다운 태도일테니...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의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