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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조선의 왕들

[정조] 넘었으되 넘지 못한 선을 밟다

by 전경일 2011. 12. 28.

8세의 어린 나이에 아비의 죽음을 보아야만 했던 아들. 그 아들은 아비를 죽인 할아비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도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일에는 절대 관여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는다. 어려서부터 정치의 비정함을 몸소 깨달았던 아들, 아비의 묘소인 영우원을 참배할 때마다 옷소매를 적실만큼 울어댔던 아들, 아비의 죽음과 같아서는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독살설’의 주인공이 되고만 아들. 조선의 제22대 국왕, 개혁군주 정조를 만나본다.

-왕을 이야기할 때 ‘삼불필지설(三不必知設)’을 먼저 꺼낼 수밖에 없는데요. 세손 무렵일 때 정국은 어땠나요?

“왕이 되기 전, 나는 한낱 바람 앞의 촛불에 불과했소. 아비를 죽인 노론계의 홍인한이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를 알 필요도 없다. 더욱이 조정의 일까지도 알 필요가 없다”며 나의 지위를 부정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못들은 척 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는 것이었소. 잠재적 정적인 나를 제거하려 한 것이지.”

-견디기 어려운 시절이었겠는데요?

“견디기 어려웠소. 허나 당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지. 할아버지 영조가 그나마 아들을 죽인 죄책감에서에서였는지 ‘삼불필지설’을 놓고 벌인 다툼에서 나의 손을 들어준 것만으로도 큰 다행이었소.”

-대리청정을 한지 두 달 만에 영조가 승하하고 왕이 되셨는데요, 맨 처음 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바로 잡는 것이었소. 이 나라 조선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우선 내 아비를 죽음으로 몰아간 탕평당 인물들을 제거하는 것이었소. 개인적 보복이 아니라,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한 것이지. 홍인한, 홍봉한, 정후겸 등과 숙의 문씨, 문성국, 정순왕후 김씨 일가에 철퇴를 내린 것은 정치 행위였소.”

-그 결과 집권초기 안정되었나요?

“위험은 늘 있었지. 탕평탕 핵심인물인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이 자객을 보내 대급수로 나를 살해코자 했으니. 게다가 역모도 있었고. 홍신해, 홍이해, 은전군 등 23명을 사형시켜야만 했소. 허나 나를 세손시절부터 후원해 주었던 홍국영을 내 친 것은 내가 무엇보다 중심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요.”

-왕께서는 학문을 좋아하고 규장각을 만드는 등 문치로 인해 세종대왕과 비유되곤 하는데요. 국왕에게 학문이란 무엇입니까?

“국정은 모름지기 어떤 정책이든 학문적 뒷받침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요. 일의 전후 과정을 염두에 두고, 그것이 미칠 영향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지. 게다가 국왕은 만백성의 스승이기도 하니, 몸소 수신의 철학을 체화시켜야 하기도 하고. 내 국정운영 방식은 학문에 있소. 그건 후세가 더 잘 알 것으로 보오.”

-왕 하면 응당 실학과 연계되는데요.

“그건 당시 국내 및 세계사의 변화와 관련 있소. 정묘,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다들 우숩게 보았지만, 청의 발전상은 이제 ‘조선이 청으로부터 배울 것은 배우자’는 생각이 자연 들게 했소. 노론계 자손들도 그랬고, 이익 같은 성호학파나 홍대용 같은 실학파도 그러했지. 사회적 분위기는 ‘보수’가 여전했지만, 무너지는 둑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소. 오랑캐라도 배울 건 배워야지. 내가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정약용에게 주며 기중기 제조법을 설계토록 한 것도 다 서양 학문 영향 아니었소.

-그 혜택을 누린 사람들이 있지요?

“서얼 출신이었던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을 말함이오? 능력 있는 자들을 신분에 구애없이 규장각에 등용하고, 향임에 임명하고, 장용영에도 배치한 것은 그들로서는 광해군 시기 서얼의 벽을 타파해보고자 ‘칠서의 변’을 일으킨지 170년 만의 일이니, 시대의 요구였다고 해야겠지. 이 모두 시대 흐름과 탕평의 일환이었지.

-그리하여 왕 재위 12년에는 채제공이 우의정에 발탁됨으로서 영의정은 노론의 김치인이, 좌의정은 소론의 이성원이 맡아 하게 되어 3당 연합 체제를 구축하게 된 것이군요.

“당목이 있는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지, 아암...”

-이제 마지막으로 화성 신도시 건설과 왕의 급작스런 죽음을 얘기해야 할 때인데요.

“음-. 말년에 물러나면 나는 수원에 가서 아버지 무덤 곁에서 살고 싶었소. 그게 효를 못한 채 아버지를 보내야만 했던 내 심정이었고. 수원에 화성신도시가 생긴 것은 그런 저런 의미가 크지. 헌데 나의 죽음은 말야... 그게 오회연교(五晦筵敎: 정조가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영조의 당부가 바뀔 수 있음을 시사한 하교)가 있고나서 채 한 달도 안되어서 인데, 내 몸에 종기가 온 몸으로 급속히 퍼지더군. 노론 벽파가 건의해 수은을 치료제로 썼다는데,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내 앞에 있던 유일한 사람은 나의 정치적 라이벌이던 정순왕후 혼자였던 그 기억 밖에는 없소.”

개혁군주로 세종에 이어 가장 훌륭한 왕으로 평가받았던 정조는 끝내 이렇게 해서 생을 마감한다. 넘었으되 넘지 못한 선이 엄연히 그의 생에 가로놓여 있었다. 그러니 어찌 큰 나무는 모조리 베어지고, 잡목만이 산에는 가득하다며 우리 역사의 민낯을 가리킨 말이 헛되다고 하겠는가.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의 저자. 인문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