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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조선의 왕들

[헌종] 세상의 격랑에 두 눈을 감고

by 전경일 2011. 12. 28.

격랑은 애써 외면한다고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진 세파는 바로 부딪쳐야 살 방도를 찾게 된다. 헌종 연간(1834~1849년)은 조선이 후기로 치달을수록 내․외부적인 도전에 강하게 부딪치는 시기였다. 헌종은 효명세자(익종)과 신정왕후 조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해 8세의 어린 나이에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소년왕의 경우 으레 등장하는 외척의 발호와 부정부패는 헌종 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헌종을 만나본다.

-왕께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해 역시 대비로부터 수렴청정을 받게 되었지요? 그 만큼 왕권이 휘둘렸다는 얘기가 되는데, 어떠셨는지요?

“내 어린 나이에 국왕에 올라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 김씨의 청정을 받게 되었지. 11세가 되었을 때에는 김조근의 딸을 왕비로 받아들이며 안동 김씨의 세도 시대가 열렸고.”

-그러다 왕께서 친정을 시작하자, 이번에는 생모 신정황후(조대비)의 외가가 국정을 쥐락펴락했었지요?

“그렇다네. 외조부 조만영이 어영대장과 훈련대장 등 군권을 장악하면서 외조부의 동생 조인영과 조카 조병헌, 아들 조병구 등을 요직에 앉혀 국정을 장악했지.”

-사정을 따져보면, 안동 김씨에게서 풍양 조씨에게로 권력이 넘어온 거네요. 특별히 달라진 게 있었나요?

“달라지긴... 양 씨 모두 자신의 가문의 탐욕에만 눈이 멀었지. 민생이든 사회 문제에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네.”

-국왕으로서 무력함을 느끼셨겠군요. 현실을 타개하고자 노력한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나는, 글쎄 힘을 펼 수 없었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젊음을 아리따운 궁녀들을 통해 발산하는 것 말고는...”

-이양선이 출몰하고, 나라의 국태가 위태로운데 그에 대한 경각심이 생기지는 않았고요?

“삼정이 문란했고, 영국과 프랑스의 이양선이 출몰해 민심이 극도로 흩어지고 있었지. 게다가 18세기에 들어온 천주교가 평민층에 퍼지며 조정을 위협했고.”

-양이(洋夷)들을 상대하기 위한 대책도 전무하다시피 한 것 같던데요?

“전무했지. 기껏 중국 북경에 가서 서양에 대해 귀동냥하는 게 다였고, 대책이라는 게 고작 유생들의 입에서 나오는 척화뿐이었지. 유림들은 ‘성인의 도는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으니, 인의로써 방패와 창을 삼고 충신으로써 갑옷과 투구를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다였지. 그걸로 어찌 흉악무도한 양이들을 막을 수 있었겠나?

-유생들의 말에 대해 조정의 반응도 별반 다를 바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일테면, 유림에서 얘기하는 척사에 대해서도 ‘만약 사악한 무리들이 들으면 족히 마음을 바꾸고 자취를 감출 것이다’라는 식으로 반응한 게 조정의 의견 아니었나요?

“부끄럽네만, 그게 당시 조선의 세계 인식 수준이었네.”

-그 결과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더욱 강화한 것이고요.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 1846년에 일어난 ‘병오박해’가 다 그런 것이지요. 게다가 이런 천주교 박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간 세력 다툼의 명분으로 쓰여 풍양 조씨는 안동 김씨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천주교를 더욱 탄압하게 된 것이고요.

“그렇다네. 내 재위 기간이 되면 천주교는 이제 평민들에게 급속도로 종교로 수용되어 1865년에는 2만 3,000여명을 처형하기도 했지.”

-그야말로 대탄압이자, 학살이었는데요. 천주교가 그렇게도 두려웠나요?

“조정이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주를 불태우고,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것은 국가 존립의 문제였네. 백성들에게 천주교의 사랑과 박애 논리는 가렴주구가 판치는 세상에 단비와 같았을 것이지만, 조선 사회의 모순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지. 게다가 황사영의 백서 사건 때 이들은 양이(洋夷)를 불러들이려는 시도까지도 했고.”

-그건 종교 탄압이 가져온 자구책 아니었나요? 오히려 천주교를 용인하였더라면 종교보다는 문물 쪽으로 서구와 접할 기회가 더 많았을지 모르지요. 그런 차원에서 실학은 왜 잦아들었는지 의아한데요.

노론 벽파가 집권한 이후에는, 남인이나 북학파 계열의 실학자들은 조정에서 쫒겨났고, 또 죽음을 맞이했지. 실학조차 현실 참여적이라기보다는 그저 고증학이나 금석문 같은 학풍으로 바뀌었고. 조정 내에 체제 개혁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네. 청나라로부터 <해국도지>와 <영환지략>같은 책자가 소개되어 왔어도 이를 현실 정치에 적용할만한 사람이 없었네. 작은 기득권에 매몰돼 나와 다른 의견을 지닌 자들을 제거한 결과는 참담하였네.

18세기 들어 서구 열강의 동진(東進)으로 세계사적 변화가 목전에 당도했지만, 내부 정치와 당파로 얼룩진 조선은 급기야 영국이 아편전쟁을 통해 중국을 송두리째 집어 삼키는 상황조차 외면하게 된다. 내부 혁신의 노력도 없었거니와 혁신 주체 세력들이 다 정치적으로 제거된 마당에 헌종 재임기는 구한말의 위태로운 정국을 예견해 주고 있었다. 오늘날 기업에서 주어진 기득권보다 더 큰 도전 자세로 변화를 맞이해야 하는 것도 이 같은 역사가 주는 교훈 아닐까?

 인문경영연구소장. 전경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