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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해전: 거북선은 적진을 가르고

by 전경일 2012. 8. 7.

당포해전: 거북선은 적진을 가르고

당포해전은 사천해전을 시작으로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을 포함한다. 이때 장군은 왜선 70여 척을 격파한다. 이 사천해전에서부터 저 유명한 거북선이 등장한다. 장군은 적의 형세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적은 이미 상륙해 산 위에 진을 치고 배는 산 밑에 벌여 놓았다. 적의 상태를 파악한 장군은 적과 아군의 위치, 조류, 공격방법 등을 판단한 다음, 유인작전을 펼치기로 작전계획을 세운다. 사천해전은 유인 섬멸이 주전략인데 그 진행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천에 이르러… 공은 아침 조수가 나갈 때라 큰 배가 뭍 얕은 항구로 들어가기 어려우므로 짐짓 패한 듯이 하여 꾀어내어 한바다에서 쳐부순다면 섬멸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드디어 나팔을 불며 배를 돌리니, 적이 예상한 대로 따라 나오므로 거북선을 앞세워 여러 전함으로 쳐들어가니, 엎어지는 적선과 물에 빠지는 적들이 바다에 가득하고, 남은 적들은 해안에서 울부짖을 뿐이었다.

 

 사천해전도. 적의 조총에 맞아 어깨에 박힌 탄환을 빼내는 장군의 모습을 상상도로 그렸다. 조선수군은 장군의 지휘 하에 필사즉생의 각오로 전투에 임해 귀중한 승리를 이루어 냈다. 거북선이 이 전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사천해전에서 보여준 유인섬멸 작전은 당항포 해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적선을 유인해 쳐부수는데, 장군은 이에 대해 “우리들이 거짓으로 포위를 풀고 퇴군할 것을 보이어 진을 후퇴시키면, 적들이 반드시 그 틈을 타서 배를 옮길 것이니, 그때 좌우에서 쫓아 공격하면 거의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이충무공전서⟫권2 장계1)라고 밝히고 있다. 이런 유인책에 걸려든 적은 이후 한산도에서도 아군 대승의 제물로 바쳐진다. 육지와 바다에 강고하게 포진해 있는 적을 섬멸하기 위해 장군은 적들이 움직이는 때를 보고 상황을 전변시키고자 했다. 장군은 이 전투에서 적선 12척을 불사르고 이후 함대를 모자랑포로 이동시켰다가 사량 해상에 이르러 군사들을 쉬게 했다. 이후 당포에서 적선 21척을 맞아 섬멸시켰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지원군으로 전선 25척과 만난다. 이로써 장군은 이억기 및 원균과 함께 전선 51척의 통합함대를 편성한다. 당항포에 이르러 양쪽 산기슭의 강 같이 된 지형에 적합한 다종진을 형성하여 한꺼번에 적을 격멸했다. 2차 출전인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 4번의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왜선 72척을 격파했다. 이때는 적의 저항이 강해서 13명의 전사자와 이순신 및 나대용을 비롯한 34명이 부상을 입었다. 장군은 전사자는 고향으로 보내 장사 지내게 하고, 그 처자는 구휼법에 따라 배려하고, 주변에 몰려든 피난민 200여명에게는 왜선에서 노획한 쌀과 포목을 나누어주었다. 신뢰와 화합의 ‘쉐어웨어(shareware)리더십’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곤 함대를 여수와 가까운 장생포 등으로 이주시켰다.

 

당포해전의 의의는 거북선을 작전에 투입시켰다는 것과 이억기와 원균까지 포함한 통합함대를 구성하여 조직 통합을 최대한 꾀했다는 점이다. 이때처럼 원균과 이순신이 조직 통합의 모습을 계속 견지해 나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2차 출전의 의의는 수륙협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점, 거북선을 이용해 전투력의 우위를 드러낸 점, 풍부한 전투 경험을 살려 능숙한 기동, 유인, 매복, 집중공세, 포위, 기만 등의 전술로 여러 전투법을 완성한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이후의 해전에 드러나는 전투 경험의 총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장군은 사천전투에서 왼쪽 어깨에 총알이 박히는 부상을 당해 흘러내린 피가 발뒤꿈치를 적셨다. 전투가 끝난 다음 장군은 태연하게 군도(軍刀)로 박힌 탄환을 파냈다. 뒤에 장군은 유성룡에게 보낸 서신에서 “어깨 뼈 깊이 들어 간 상처로 고름이 흘러 아직 옷을 입을 수 없다”고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전쟁 초기에 장군이 입은 부상은 적지 않은 후유증을 가져왔을 것으로 보인다. 그날 장군은 관통상을 입었지만, 활을 놓지 않고 끝까지 진두지휘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