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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일본의 군국주의 준비

by 전경일 2012. 8. 23.

일본의 군국주의 준비

 

일본은 선진 자본주의 열강이 제국주의로 이행하는 전야에 해당하는 1853년에서 1877년 사이 급격한 국가적 변화를 초래한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 함대의 사령관인 M.C.페리 제독이 개국(開國)을 요구하는 국서(國書)를 가지고 일본에 들어오자 이때부터 ‘유신(維新)’이 싹트기 시작한다. 일본은 1854년 미·일 화친조약을 체결한데 이어 1858년 미국을 비롯해 영국·러시아·네덜란드·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하지만 이 조약은 천황의 칙허 없이 막부가 독단적으로 처리한 것으로 이후 반(反)막부 세력이 일어나 막부와 대립하는 격동 국면이 벌어진다.

 

1866년 막부가 패배하자, 이듬해인 1867년 일본에서는 ‘대정봉환(大政奉還, 왕정복고)’이 일어나며 명치(明治)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명치정부는 학제·징병령·지조개정(地租改正)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 하에 구미(歐美) 근대국가를 모델로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력 강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서구 열강과의 관계에서 터득한 ‘개혁 사상’이 제국주의 국가의 발판이 되는 것이다. 그 무렵 일본은 천황을 절대주의 국가의 최상부에 위치시키며 국가 지배 체제를 구축하고, 구미에 대해서는 굴종적 태도를 취하는 반면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는 서구 제국주의가 했던 방법보다 더 강압적이고 침략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1894년 청일전쟁 도발, 1904년 러일전쟁 도발은 대표적 예에 해당된다. 물론 그 다음 단계는 6년 후 조선을 폭력적으로 병합하는 것이었다.

 

근대 시기 일본의 무력 행진은 지금 일본이 취하고 있는 행로와 매우 비슷하다. 100여 년 전 청일전쟁은 현재 중국·대만과 ‘댜우위다오’(조어대 열도, 센카쿠 열도) 분쟁으로 나타나고 있고,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쿠릴열도 분쟁으로, 한․일합방은 지금의 동해 및 독도 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더구나 근대 시기 일본이 취한 해양 세력 의존적 대외정책인 ‘서구 경도성(傾倒性)’은 오늘날 일본이 동북아 국가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서 거의 유일하게 대미 근친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근대 일본이 비(非)서양 국가 중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이유로 서양으로 분류되곤 했던 역사적 경험과 그대로 겹쳐진다.

 

근대 시기, 일본은 일련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운양호사건(강화도 조약)을 일으키고 그 결과로 조선 병탄을 가져온다. 명치유신(1867년)에서 강화도 조약(1876년)까지는 9년의 시차가 있다. 그렇다면 명치유신기처럼 지금 일본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길레 이 같은 침구 시점을 예상하는 것일까? 근대 시기 벌어진 두 개의 사건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시차 예측’의 단초가 된다.

 

㈎ 1854년(미·일 화친조약)과 1858년(미국 등 국가와 통상조약 체결)

㈏ 1867년 명치유신시 ‘징병령’ 발동

 

즉, 현재 일본의 움직임이 ㈎, ㈏에서처럼 근대 시기 일본의 일련의 제국주의적 침략 추진기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점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와 대칭되는 일본 내 20세기 현상을 살펴보면, 1983년 ⟪방위백서⟫에서 일본은 ‘정치적 수단으로서 군사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데 이어, 1997년에는⟨신(新)미·일 방위협력지침(뉴 가이드라인)⟩을 공포하고, 1999년에는⟨주변사태법(周邊事態法)⟩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이어 2002년에는⟨유사법제(有事法制)⟩를 제정해 근 30년에 걸친 전력(戰力)보유와 군사행동의 길을 터놓았다. 특히 2002년의⟨유사법제⟩는 일본의 대외 침략이 가능해 질 수 있는 법적 분수령을 이루는데 여기서 일본은 ‘한반도 유사시(有事時) 대량 난민이 도래하는 것에 대처’할 수 있도록 법제화시켜 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2차 대전 후 ‘전쟁 포기, 전력(戰力) 불(不)보유, 교전권 부인’을 명시한 일본⟨평화헌법(平和憲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 자위대 파병의 길을 열어 놓고 있다. 문제는 일본이 말하는 ‘한반도 유사시’가 객관적으로 검증된 특정 상황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얼마든지 자의적이고 주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한반도에 대해 군사적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와 대칭되는 것으로는, 1992년 유엔평화유지활동군(PKO)으로 캄보디아에 파견한 선례와 1993년 아프리카 모잠비크에 일본 자위대를 파병한 것과 맞아 떨어진다. 명치유신기 ‘징병령’이 일본 국민을 총동원해 일본 측이 생각한 ‘해외 진출’을 꾀하려는 게 목적이었다면, 90년대에서 2000년대 들어서의 일본의 군사적 파병은 이와 떼어놓고 볼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명치유신(1867년)에서 강화도 조약(1876년)까지의 시차가 9년이듯, ‘미·일 화친조약(1854년)’의 확장판인 ‘미국 등 국가와 통상조약 체결(1858년)’에서부터 명치유신시 ‘징병령’(1867년) 발동까지도 시차는 정확히 9년을 가리키고 있다. 우연으로만 보기에는 여러모로 상징하는 바가 크다.

 

‘시차’의 유사성이 드러내는 것들

 

이런 유사성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이 있다. 즉 독도문제와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 그리고 금세기 들어 일본의 잦은 자연재해와 인적재해 같은 ‘왜환(倭患)’ 요소들이 앞서 1876(1910)년판 한반도 침구를 복제해 낼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1983년부터 일본이 본격적으로 대외 팽창책을 취한 것을 볼 때, 한반도에 대한 ‘무력 개입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명기한 2002년의⟨유사법제⟩는 역사적으로 침구개시 가능 기점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일본의 재침 가능시점을 증명이라도 하듯, 2011년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 극우파 “자민당 의원들이 울릉도를 방문하겠다며 김포공항에 입국”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그간 독도에 대해 외교적 자극을 통해 간접 침구행위를 일삼던 일본의 침탈 행위가 일본 정치인들에 의해 구체적 행동으로 옮겨졌다는 점에서 예의 주시할만한 것이었다. 이로써 우리는 독도문제와 관련되어 일본의 ‘정치인’들이 벌린 ‘울릉도 방문’이라는 사상 유래 없는 침탈 목적의 입국사태와 직면하게 된다. 이 사건이 있은 지 3일 후 “일본 요코하마(橫浜)시 교육위원회에서는 일본 우익단체 ‘일본교육재생기구’가 만든 이쿠호샤(育鵬社)판 교과서를 쓸 것을 채택”했고, 입국 소동이 있은지 22일 후에는 “초당파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일본의 영토 관련 의원연맹이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도록 정부에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로써 그간 “일본이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할까 봐 ‘조용한 외교적 대응’이 최선이라고 주장”해 온 한국 정부와 대일(對日) 온건주의자들의 주장은 설 곳이 없어졌고, 입지도 약화되었다.

 

이는 일본 극우파들이 ‘초당파’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도문제가 확산·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자, 동시에 국제정치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한 채 일본의 간교에 우리가 ‘순진하게’ 놀아난 면을 부각시켜 준다. 게다가 2011년 들어 일본 극우파인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가 일본 총리가 되면서 팽창주의적 발언을 쏟아내는 행태로 볼 때 앞으로도 한․일 관계는 영토 문제로 더욱 긴장이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이 앞서 주장한 명치유신에서 강화도 조약까지의 시차는 9년이다. 이 9년은 일본이 ‘한반도 무력 개입’을 구체적으로⟨유사법제⟩로 법제화한 2002년과 명백한 영토 침구 목적으로 일본 정치인이 한국에 입국한 2011년까지의 시차(9년)와 같다. 여기서 2011년을 일본 ‘신(新)왜구’의 1차 침구 기점으로 잡은 것은 침구 목적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2011년 침구’와 함께 일본의 한반도 재침․침구가 예상되는 유력한 시기인 ㉬은 언제쯤일까? 이의 기준은 강화도 조약(1876년)에서 한․일합방(1910년)까지 시차인 34년이 적용될 수 있다. 즉 침구 행위가 구체적으로 벌어졌고, 이를 조약 형태로 강제한 강화도 조약과 그 결과로 합방에 이르는 시점을 기준으로 볼 수 있다. 이 시차를 반영해 보면 일본 ‘재침설’이 가능한 시차표에 ‘( ? )’으로 남아 있는 시점(㉬)은 2045년이 된다. 물론 그 시차는 34년으로 강화도 조약(1876년)에서 한․일합방(1910년)까지의 시차와 동일하다.

 

그렇다면 일본 ‘신(新)왜구’의 준동이 심각한 양상으로 타나나고 있는 2011년과 정확히 34년 시차를 보이고 있는 2045년 상황은 한․일 양국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2045년은 우리로서는 해방 후 100년이 되는 시점이다. 이 시기까지 일본은 우리의 뜻과 반대로 어떤 식으로든 독도문제를 국제분쟁화하는 데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력이 사태의 악화를 가로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안임은 강조할 나위없다.

 

왜구 침구와 관련되어 2045년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에게는 해방이었던 1945년 8월, 2차 대전에 패망해 한반도를 떠나며 조선총독부의 수장이었던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난긴 망언과 중첩되기 때문이다. 이 전형적인 일본 ‘근대 왜구’는 한반도를 떠나며 다음과 같이 망언을 쏟아냈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민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한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그가 지목한 재침 시점인 ‘100년이라는 세월’은 2045년이 기준 되는 것으로 최근 일본의 극우적 동향과 맞물려 결코 우연의 일치로 보이지 않는다. 왜의 재침구 시기는 2045년 전후로 우리에게는 실로 국가의 존망지로가 달린 위급한 현실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한반도 주기 침략설’은 일본의 대외 침략이 표출된 역사적 실례를 통해 면밀히 우리 시각으로 분석한 것이나, 일본학자의 눈에도 이와 비슷한 일본 침략(전쟁)의 ‘주기설’이 엿보인다. ⟪근대 일본의 전쟁 논리⟫를 쓴 가토 요코(加藤陽子)는 2차 대전 전 일본이 10년마다 전쟁을 해 왔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청일전쟁: 1894년 7월 25일~1895년 4월 17일

러일전쟁: 1904년 2월 6일~1905년 9월 5일

1차 대전: 1914년 8월 23일~1919년 6월 28일

···

만주사변: 1931년 9월 18일~1932년 2월 18일

2차 대전: 1941년 12월 8일~1945년 8월 15일

 

개전 연도로만 살펴보면 1차 대전과 만주사변 사이를 빼고는 일본은 정확하게 10년마다 전쟁을 치러 왔음을 알 수 있다. 근대 들어 일본의 이 같은 ‘주기 침략’은 각각의 전쟁이 한반도와 뗄 수 없는 관련성을 지니고 있고, 향후 한반도 재침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극히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이처럼 재침 시기까지 짚어보며 어두운 예측을 해보는 것은 최근 일본의 극우주의적 움직임과 관련되어 있다. 독도문제와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는 한․일 간 갈등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독도문제’는 한․일 간 갈등이 전화(戰禍)로 급전환될 여지가 충분히 있는 뇌관에 해당된다. 이 점에서 뇌관을 만들어내고 만지작거리는 일본 내 극우주의자들의 행태는 동아시아 평화에 가장 큰 위협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으로부터 대형 침략 또는 그와 같은 계획이 있었던 각 시기 사이마다 전란의 예고자이자 증폭자로서 왜구 침구가 있어왔듯, 최근 일본의 ‘신(新)왜구주의’ 발호는 전란의 가능성을 더욱 증폭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미 한국 내와 한․일 간은 물론, 일본 내에서도 ‘대(對)왜구전’은 벌어지고 있다. 오랜 역사적 경험 상, 여러 형태의 침구 행위가 결정적으로 전쟁 국면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한반도 주기 침략설’과 ‘재침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설득력을 지닌다. 한․일 간에는 과연 앞으로 34년 내 돌이킬 수 없는 무력 충돌 사태가 벌어지게 될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왜구’를 예의 주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출처: [남왜공정- 일본 신왜구의 한반도 재침음모]>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