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만년 소통되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하라]
어느 조직이든 리더가 근본적인 문제에 골몰하지 않는 한, 그 ‘근본적인 문제’는 미결 상태로 남아 나중에 반드시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그런 까닭에 경영상의 주요 문제에 대한 미결 상태는 후세에 가장 ‘치명적인 짐(fatal burden)’이 되어 버린다. ‘한글’이 바로 거기에 해당된다.
만일 ‘한글’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문자 체계나 그에 따른 기록 방식 그리고 모든 언어 및 문자적 표현 행위는 심각한 장애를 받았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 민족이 하나라는 민족 정체성(正體性) 또한 심각하게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한글’이라는 문자(文字)는 우리를 하나로 묶는데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은 시공을 뛰어넘어 세계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커뮤니케이션과 정보혁명을 가능하게 한 수단이었다. 이러한 영구한 업적, 그 가운데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이름이 있으니 그가 바로 세종대왕이다.
세종은 ‘한글’을 통해 우리 의식을 깨우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노력으로 모든 백성의 머릿속에 반짝이는 지혜의 등불을 달아주고자 했던 것이다.
[세종,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을 이루어 내다]
세종은 현명한 경영자였다. 신생 조선의 CEO로 임명되면서 그는 자신의 경영 대상인 ‘백성’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 충분히 숙고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특수한 계급에서나 쓰는 문자인 ‘한자’로 밖에 전해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백성들에게는 결코 쉽게 전달될 수 없었다. 더구나 백성들의 말은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해 CEO에게 이르지도 못하고 단절되거나, 왜곡되었다. 이 무렵 서로가 통하지 못하는 절대 장애를 세종은 통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은 당시 지배계급의 원칙을 깰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백성과 어떻게 교감할 것인가?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바로 ‘한글’이었다.
한자만이 기록의 전부이자, 기준이었던 그 시대에 전혀 새로운 발상과 창조로 세종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제시한 셈이다. 이것은 실로 지금까지 가져왔던 이 나라 백성들의 표현 방식에서 하나의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했다. ‘한글’ 그 자체 만큼이나, 한글을 창제한 세종의 정신은 이런 근본적 문제를 해결했다는 차원에서 더욱 생명력을 잃지 않고 우리 정신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글자를 안다는 것은 무엇이길레 이리도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한글’은 백성들에 대한 접근 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것은 문자가 언어를 표현하는 수단이고, 이것이 소통을 지속시켜 나가며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준 예에 해당된다.
세종은 누구보다도 글자의 힘을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지식의 대부분을 책, 즉 ‘문자’를 통해 얻지 않았었는가! 국가 CEO로서 그는 자신을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하는 백성에 대해 무한 책임의식을 가졌다. 그리하여 그는 이전 시대와 달리 소통하지 못하는 벽을 넘어,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가 하나의 커다란 의미로 거듭나고자 했던 것이다.
[모든 것은 디지탈이다. 소통 네트웍을 만들라]
어느 시대건, 어떤 경영 환경에서건, 효과적인 의사소통 방식이 없다면, 실제로 소통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또 기록되어야 할 정신적 유산조차 결코 남아 있게 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어느 시대나 개개인이 갖고 있는 영감은 표현을 기대한다.
세종은 한글을 통해 비로소 백성들의 이러한 기대에 부응했다. 한글은 백성들이 그들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한편으로 그들의 진정한 마음을 읽고, 그들에 대한 진정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고안된 문자였다. 누구나 다 알고, 쓰고 있는 이 혁명적인 문자는 세종 25년에 완성되었던 것이다.
“이 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셨는데, 그 글자는 고전(古篆)과 비슷하고, 초성ㆍ중성ㆍ종성으로 나누어지는데, 이것이 합쳐진 이후에 문자가 된다. 무릇 한자 및 우리나라 말을 모두 가히 쓸 수 있다. 비록 문자가 간단하지만, 그 전환이 무궁무진하다. 이를 「훈민정음」이라 한다.”(『세종실록』 25년 12월)
한글 창제의 위대한 공신인 정인지는 바로 이렇게 기록했던 것이다. 이 ‘간단하면서 무궁무진한 글자’는 그로부터 3년 뒤 세종 28년 9월에 가서 만인에게 공표되기에 이른다.
(다음회에 이어서...)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