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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이순신 |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한산대첩: 개별 승리보다는 전체 판세를 뒤집어라

by 전경일 2012. 9. 4.

 한산대첩: 개별 승리보다는 전체 판세를 뒤집어라

한산대첩은 임진년 7월 6일부터 13일까지 8일간에 걸쳐 견내량 및 안골포에서 적선 89척을 격침시키고, 12척을 나포한 쌍방 간 교전이 치열했던 대전이다. 견내량 해전은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주력함대 73척과 이순신 함대 56척간 결전이었다. 견내량은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과 같은 큰 배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다. 지형으로만 놓고 본다면 당연히 조선수군에게 불리했다. 불리한 지형을 장군은 혁신적 전법으로 돌파한다. 나라의 운명을 건 대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저 유명한 혁신전법인 ‘학익진법(鶴翼陣法)’이 전면 등장하는 것이다.

 

원래 학익진은 육전에서 발전된 것이다. 그러던 것이 해전에 맞게 일부 변용되어 이용되어 왔다. 육지에서 바다로 넘어오며 학익진의 형태도 변화되었다. 일반적으로 육상에서는 횡렬진이지만, 해전에서는 첨자찰(尖字札, 복쐐기진)이나 일자진(一字陳, 횡렬진)을 이룬다. 전방 날개는 오목꼴, 좌승함 뒤쪽은 작은 쐐기골이었다. 이는 좌승함 보호에 가장 적절한 전형으로 평가된다. 학익진법으로 대형을 바꾸려면 민첩하고 정확한 상황 판단력이 뒤따라야만 한다. 이순신의 전략적 유연성은 이런 데서 드러난다. 장군은 견내량 전투 시 이 전법을 전격 한판 승부의 카드로 꺼내든다. 거북선과 학익진의 결합은 상상을 초월한 시너지 효과를 내며 승세를 증폭시켰다. 전술 무기와 작전이 온전히 화학적 결합을 이루며 무적 이순신 함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만큼 ‘학익진’은 거북선과 함께 장군을 떠올리는 키워드일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학익진이 최대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학의 모양을 한 전투대형에 적을 끌어 들이는 데에만 있지 않다. 적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에워싼 다음, 집중 화포공격을 가하는 함포전이 뒤따라야만 한다. 날개를 펼쳐 적을 둘러싸고 위압하여 일시에 조총보다 사정거리가 긴 대형 함포를 방포함으로써 적의 경쟁력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장군이 임란 전 지자, 현자, 승자 등 각종 총통 개발에 몰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유인된 적은 바다 한가운데서 학익진으로 둘러싸여 총통 세례를 받고 기세를 잡은 아군은 앞을 다투어 돌진하며 화살과 화전을 번갈아 쏘아 적선을 불 지르고 적을 사살했다. 이런 작전엔 함대 간 연락 체계라든가 일사불란한 지휘와 전투 수행력이 밑받침되어야 한다. 이때 장군은 전투 전개 시 ‘정치(精緻)한 공정(工程)’을 실현한 것이다. 즉 학익진 전법과 전략병기가 결합되어 한 치의 빈틈없이 전투 과정을 프로세스화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기업은 보다 높은 성과향상을 위해 프로세스 혁신을 필요로 한다. 어설픈 생산 공정 하에서는 불량품만 늘고 생산성도 극대화할 수 없다. 장군은 전투 수행 시 이 같은 절차와 수순을 통합해 내는 혁신전투공법을 적용한 것이다. 이 같은 학익진은 왜군의 백병전을 무력화시키는 전략이었다. 이 전법은 군사학적 의의는 물론, 21세기 경영학적 의미로 ‘일제집중타방전법(一齊集中打方戰法)’을 전개한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자원을 한 곳에 집중해 특정 부문에서 확고부동한 경쟁우위를 다진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는 전투 수행 시간인데, 장군은 주력집중방식을 적용해 전투 시간도 최적화시킴으로써 가능한 한 짧은 시간 내 승부를 결정지었다. 아군의 전력 손실을 막으며 적에게 짧은 시간 내 궤멸적 타격을 준 것이다. 비유하자면, 예컨대 오늘날 기업들의 집중근무제처럼 근무 몰입도를 높이고 성과를 극대화시킨 전략과 같다 하겠다.

 

 

학익진과 화포 공격의 복합 시너지 효과

학익진은 학(鶴)이 날개(翼)를 펼친 듯한 형태를 취한 진법(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렬 횡대의 일자진(一字陣) 형태를 취하고 있다가 적이 공격해오면 중앙의 부대는 뒤로 차츰 물러나고, 좌우의 부대는 앞으로 달려 나가 반원 형태로 적을 포위하며 공격하는 전투전개방식이다. 이 진법은 육상 전투에서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騎兵)들이 수행하기에 좋을 뿐 아니라, 해상 전투에서도 기동력이 뛰어난 전선(戰船)들이 효과적으로 적을 공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순신은 육전 전투법을 해상에 변용, 적용해 한산대첩(閑山大捷) 등에서 왜군을 대파한다. 여기엔 기동성이 뛰어난 함대 운용과 조총보다 사거리가 긴 화포 공격이 창의적 전법과 복합시너지를 내며 효과를 극대화한 면이 주효했다. 여러 요소를 통섭해 전술 지식을 현장에 접목시킨 장군의 창조적 혁신과 운용의 묘미가 읽혀진다. 기업은 장군이 펼쳤던 학익진 전법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학의 날개를 활짝 펴고 글로벌 시장을 품을 대담한 구상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게 된다.

 

견내량 전투에서는 앞서 당포해전에서 등장한 거북선이 3척 투입된다. 당포해전의 성과를 반영해 거북선을 전면 배치한 것이다. 이는 성공방식을 복제해 더 큰 승리를 이뤄내려는 전략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견내량 전투는 적의 수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함으로써 조선수군이 남해 제해권을 되찾아온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의가 있다. 조선수군으로서는 호남이 유린되며 왜적이 서울까지 단숨에 치고 들어가는 지름길을 봉쇄한 것이고, 왜군으로서는 견내량 패배로 호남 진출이 꽉 막혀 버린 형국이 된 것이다.

 

승전한 이순신은 다음날 견내량을 출항하여 다시 적을 찾아 나선다. 10일 새벽, 장군은 적이 안골포에 있다는 척후를 받고 안골포로 향했다. 그런데 안골포의 지형은 포구가 협소하고 물도 얕아 아군에게 불리했다. 따라서 판옥선 같은 큰 배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유인작전을 썼으나 적이 말려들지 않자, 장군은 작전 계획을 변경하여 여러 장령들에게 번갈아 왜선이 있는 곳까지 드나들며 각종 총통과 장편전을 발사하게 한다. 하루 종일 쌍방 간에 화력에 의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안골포 전투는 장군이 얼마나 전술 운영 면에서 응용성과 현장성을 뛰어나게 적용했는지 잘 보여준다. 즉 경영현장 자체로는 유·불리가 따로 없다는 인식 하에 불리함을 유리함으로 전환시켜 전략 우위를 창조해 낸 것이다. 이처럼 안골포에서 장군은 불리한 지형을 전투 방식의 변경을 통해 극복해 나갔다. 경제위기시대, 경영자들은 경영환경이 과거처럼 우호적이지만은 않다는 불만어린 불평을 하기 쉽다. 그러나 환경이 우호적이라면 경쟁자들도 마찬가지로 유리하다. 우호적 환경만 주어진다면, 본질적 생존 지혜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다시 말해, 경영자라면 환경을 탓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죽기 살기로 싸운 공방전 결과, 장군은 적장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와 가토오 요시아키(嘉藤嘉明)가 거느린 함대 42척을 궤멸 상태로 몰아넣었다.

 

한산대첩의 가장 큰 의의는 곡창지대이자 서울로 올라가는 남서해 관문인 전라도를 지킴으로써 평안도까지 이르는 아군의 연결된 전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장군은 전략적으로 ‘호남이 없어지면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인식할 정도로 호남은 전쟁 승리의 절대 보루였다. 이 점에서 한산대첩은 전쟁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싸움이었다.

 

한산도, 안골포 해전의 승리로 조선은 전쟁 이후 처음으로 적의 침략 계획을 좌절시키고 전국(戰局)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전환점을 맞이한다. 장군의 전략은 대부분 적선이 기지에 정박했을 때 이를 찾아 기습공격을 하는 게 특징이나, 이 한산대첩은 왜가 공세 전략을 취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이는 왜(倭) 해군의 잇따른 패배에 대해 토요토미가 함대를 총동원해 이순신 함대를 격파하라고 명령 내렸기 때문이다.

 

기업은 글로벌 경쟁 하에 판도 자체를 바꿀 전략을 선택해야만 한다. 강력한 연구개발에 기초한 핵심경쟁력 확보나 시장에서의 브랜드 인지도 강화 전략은 단순히 개별 상품이 팔려나가는 각개격파식 전술보다 판세 자체를 바꾼다는 점에서 훨씬 파급력이 크다. 아이폰으로 유명한 애플의 전략이 글로벌 시장에서 ‘애플=혁신’이라는 이미지에 성공한 것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결합이라는 컨버젼스형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 각처에서 생산된 초우량 부품을 애플의 경쟁력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아시아개발은행연구소(ADBI)의 조사에 의하면, 애플은 2009년 아이폰 한 대당 중국의 수출가격 기준 총 178.96달러에 들어가는 부품을 심지어는 경쟁사인 일본(34%, 60.6달러, 플래시메모리와 디스플레이 모듈, 터치스크린 등)과 한국 업체(12.8%, 22.96달러,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나 SD램-모바일 DDR 등)로부터 사들이고 있다. 이어 독일(16.8%), 미국(6%), 중국(3.6%) 순으로 이어진다. 이는 최고의 품질 부품을 아웃소싱 함으로써 글로벌 공급사슬(supply chain)을 확보하려 하기 때문이다. 아이폰은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수요를 가져와 2010년 1분기 기준 4천2백50만대가 판매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로써 달라진 판세는 무엇일까? 전 세계 휴대폰 업체들의 입지를 흔들어 놓았고, 이로 인해 애플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2007년 1월 휴대폰 제조를 시작한지 불과 3년만인 2010년 애플은 사상 처음으로 세계 휴대폰 판매량 기준 4위에 오른데 이어, 2011년 상반기에는 1위로 등극했다. 욱일승천하는 애플 주도의 판세는 전 세계 업체의 지각 변동을 가져왔다. 대표적인 예로 선진업체들의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으로 생산하던 대만의 스마트폰 제조사 HTC가 반사이익을 크게 얻어 2년 만에 시가총액이 4배나 급증하며 급기야 휴대폰 시장점유율 1위 업체인 노키아를 추월하는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 내게 했다. 판도 자체가 완전 뒤바뀐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견내량 전투의 승리는 전쟁국면 자체를 뒤집는 터닝 포인트였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기업들에게도 개별 성과보다는 전체 판세를 뒤집는 전투가 필요하다는 각별한 교훈이 된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