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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보기고

해양 리더십은 생존의 조건, 바다를 경영한 장보고 리더십

by 전경일 2012. 9. 13.

해양 리더십은 생존의 조건, 바다를 경영한 장보고 리더십

 

해상왕 장보고(張寶高)의 본명은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로 알려진다. 풀이하자면,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겠다. 그는 본래 신라의 평민 출신으로 변변한 가문은 아니었으나, 자신만의 입지전적인 노력을 통해 해상왕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그가 국제적 인물로 부각된 데에는 해외활동이 큰 몫을 차지한다. 그는 청년기에 좁아터진 신라가 아닌, 국제사회에 눈을 돌렸다. 당나라에 건너가 장교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의 성씨인 장씨(張氏)도 이때 얻은 것이다. 당시 당나라는 각지에 지방 군벌들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 무렵 토벌 과정에서 서서히 이름을 얻게 된다. 그는 이때 얻은 용병술을 육전에만 적용하지 않았다. 이를 해상에 적용시킴으로써 일약 동아시아 바다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당시 중국 산동성(山東省)지역에는 많은 신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 신라, 일본을 거저 삼각 무역을 하였고, 어떤 이는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상인들과 교역하기도 했다. 그 무렵 중국에서는 잦은 기근과 도적이 횡행해 해적들이 신라에 출몰해 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가곤 했다. 신라인이 노예로 팔려가는 것에 분노한 장보고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다른 한편 그 자신 무역에 손을 대 해상권을 잡고자 했다. 군무(軍務)에서 해상무역으로 장보고가 관심을 돌리게 된 것은 국제무역의 이익을 고스란히 독점할 수 있다는 실리적인 목적과 무관하지가 않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장보고는 828년(흥덕왕 3) 귀국해 왕의 승인을 받아 지방민을 규합한일종의 민군(民軍)을 창설해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건설한다. 청해진을 건설한 뒤, 근느 곧 해적을 소탕하고 동중국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한다. 이를 기반으로 당-신라-일본을 잇는 국제 중계무역을 주도한다.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창보고 출현 전, 신라가 일방적으로 밀렸는데, 이때부터 공수(攻守)는 뒤바뀐다. 그리하여 서기 835년에는 신라의 선박이 자주 일본 근해에 나타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에 대비하고자 일기도에 3백 30명의 무장 군사를 14개처의 각 초소에 나누어 배치시키는 등 신라의 해상활동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한반도 남부 해안 일대와 서해의 해상권은 물론 중국의 해안 일대 및 일본에까지 세력을 미친 장보고의 활동이 지대했다.

 

지리적으로 당나라와 일본의 해상교통의 길목에 청해진은 위치해 있었고, 군사 1만여 명의 군사기지를 확보함으로서 장보고의 해양 리더십을 굳건하였다. 당시 장보고의 무역은 중계무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방면의 물품이 들어왔고, 고급 직물과 비단 및 금은 세공품이 실려 나갔다. 신라 귀족들이 애용했던 향료 등 동남아시아 및 서남아시아산 물품들은 신라 상인의 중계무역으로 수입된 것이었다. 장보고는 무역 활동과 함께 외교 교섭까지 시도해 840년(문성왕 2)에는 무역선과 함께 회역사(廻易使)를 파견해 일본 조정에 서신과 공물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당나라에는 교관선(交關船)을 보내 교역을 활발히 전개한다. 장보고가 세력을 구축하게 되는 것은 이처럼 청해진이라는 가장 몫이 되는 거점을 구축하고, 1만여 명의 민군(民軍)을 조직하고, 대외 무역 이권을 거머쥠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 주효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는 강력한 지방 세력으로 성장했다.

 

장보고의 성장은 자연스럽게 중앙 정부의 권력 쟁투에 관여하게 했다. 그리하여 836년(흥덕왕 11)에는 왕위계승분쟁에 패배한 김우징(金祐徵, 신무왕)이 청해진으로 피난오기도 한다. 내부의 정치적 격동으로 신라는 838년(희강왕 3)에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장보고는 이제 중앙에 진출할 명분을 얻었다. 정변을 틈타 그는 군대를 경주에 보내 김우징이 왕으로 즉위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되었고, 내친 김에 중앙 권력에 더 깊숙히 개입하고자 그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삼고자 했다. 이는 신분사회였던 신라의 귀족들로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장보고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우려한 중앙귀족들은 장보고를 제거하고자, 그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보내 암살시키고, 곧 이어 중앙토벌군을 보내 청해진을 완전 섬멸하였다. 또한 청해진의 주민을 벽골군(碧骨郡, 김제)로 이주시켜 버렸다.

 

장보고 사후, 신라는 바다를 완전히 포기했으며, 그로 인해 바다는 당나라와 일본의 손으로 넘어갔다. 물론 그에 따라 신라의 무역활동은 퇴조로 들어선다. 만일, 중앙군에 의해 청해진이 폐쇄되지 않았거나, 혹은 장보고 세력이 추출되고 난 뒤에도 중앙정부 차원에서 바다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신라는 국제 무역의 이익을 함께 나누었을 것이고, 더욱 열린 세계관을 통해 동아시아 바다의 주역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부의 권력 쟁투로 잃어버린 국가적 자산은 이후에도 회복되지 않았다. 지속가능한 경영이 내부 분란과 쟁투, 그리고 단견으로 묻혀 버린 가장 안타까운 예라 할 것이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