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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보기고

선덕, 불리함을 극복한 예술과 같은 조건들

by 전경일 2012. 10. 19.

선덕, 불리함을 극복한 예술과 같은 조건들

 

KBS 대하드라마 ‘대왕의 꿈’이 인기리에 반영되고 있다. 팩션형 사극은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무리가 있지만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드라마를 보며 당시 신라는 어떻게 여왕을 탄생시켰는가가 궁금하기만 하다. 이른바 여주(女主)체제라 불리는 선덕왕 체제는 어떻게 우리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신라의 골품제도 내부의 모순이 작용한다. 즉 선덕왕의 즉위는 신라 진평왕대 말기에 대내외적 위기 상황에 접한 왕권이 진골귀족들의 정치세력화와 부상을 배제하기 위해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선덕왕의 즉위에는 만만치 않은 도전이 도사리고 있었다. 여왕체제는 왕위계승자로 내정된 시기부터 반대 세력들의 저항을 겪었고, 탄생한 정권은 상당히 불안정한 권력구조를 띠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왕 즉위 시 이미 상대등이었던 대신(大臣) 을제(乙祭)에게 상대등의 역할을 다시 부여하는 형식을 빌어 실제로 상대등직을 계속 수행하도록 추인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조치는 정치세력 간 견제와 균형을 통해 여왕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밑받침한 세력은 김춘추, 김유신가(家)를 핵심으로 한 여왕지지 세력이었다. 이들은 불가피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이나 지배력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정적과 손을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등극한 선덕왕은 처음에는 새로운 연호 없이 선대 진평왕대의 연호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는 즉위 직후 독자적 연호를 제정해 온 것과는 사뭇 다른 것으로 여왕체제가 불안정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 그렇다면 연호 제정을 늦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자신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정치적 배경 때문이었다. 이때 여왕 즉위를 이루어 내게 한 명분은 ‘성골 출신의 남자는 다했다’는 이른바 ‘성골남진(聖骨男盡)’이었다. 따라서 여왕을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여왕을 지지한 세력들은 정권은 잡았지만 자신의 과도기적 모습을 벗어나기 어려운 현실 조건상 연호를 선대 것을 빌어 다 썼던 것이다.

 

선덕왕이 년호를 인평(仁平)으로 개원하였던 것은 선덕왕 즉위 3년의 일이고, 나름 명실상부하게 진평왕대에서 선덕왕대로의 전환을 이끌어 낸 것은 그 이듬해인 4년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왕위 등극과 함께 진정한 선덕왕의 시대는 공식적으로는 즉위 3년 이후 연호 개원과 함께 선포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듬해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음으로써 여왕지지 세력은 대외적인 부담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왕 체제를 반대한 내부적 정적 처리도 크게 한 몫을 차지했다. 진골 계급들이 여왕이 등극하는 상황을 반대하고자 한 반란을 진압하고 무야(無也)시켜 버린 것은 선덕왕 체제의 성립에 주요한 조건이었다. 그 대표적인 이가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다.

 

여왕 즉위의 반대편에 섰던 것으로 보이는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은 실은 반(反)김춘추, 김유신 계로 볼 수 있다. 이들은 각각 신라 관등 서열이 2위와 최고 권력자 중의 하나인 상대등 신분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반란을 획책하였다가 즉시 잡혀 가족과 함께 죽임을 당하거나, 반란 사건이 누설돼 즉시 적국으로 도망치다가 국경에서 가족이 그리워 다시 왕도인 경주에 잠입하였다가 잡혀서 죽임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료는 이 점을 드러내고 있지만, 기실 그 속내는 매우 복잡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서열 2위와 상대등이 여왕 체제에 반기를 들고 나설 만큼 당시 신라에서는 여왕 체제의 불확실성이 고조되었거나, ‘여왕만들기’에 나선 김춘추, 김유신 계에 범(凡)진골계가 맞선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 여왕 체제의 성립과 나아가 안정성 획득은 불확실한 대외 변수가 결국 승부를 갈랐다. 더구나 가장 불리한 상황이 유리한 국면을 도출해 낸 면에서 극적이기조차 하다.

 

그에 대한 점을 추정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즉 신라는 당초 수(隋)나라하고는 외교적으로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었는데, 중국에 당이 들어서면서는 상황이 일변한 것이다. 신라와 수의 끈끈한 관계는 진평왕 30년에 원광법사를 보내 수에 청병을 요청하고 33년에 다시 청병 사신을 파견하여 다음해에 수가 제1차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도록 한데서 잘 읽혀진다. 그만큼 신라와 수의 관계는 동북아를 놓고 벌이는 싸움에서 서로 한 편이 될 만큼 자기의 이해가 잘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중국에서 당(唐)이 선 이후로는 아무런 외교적 성과도 이루어 낼 수 없었다.(나당연합군 얘기는 나중 일이다) 이러한 정치적 부담을 극복하고자 이루어진 것이 신라 단독의 고구려 원정이었다. 낭비성 싸움에서 분전을 하여 대승을 거둠으로써 김유신은 범(凡)김춘추, 김유신계의 입지를 한껏 높여 놓았다. 이는 앞으로 전개될 신라의 진로와 선덕왕 체제의 윤곽이 어떻게 드러날지 보여주는 일이라 할 것이다.

 

한국 사회와 글로벌 경제의 시계(視界)가 불투명한 가운데 급격한 변화 속으로 뛰어들고 있다. 드라마 ‘대왕의 꿈’을 통해 예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가장 약한 고리를 먼저 혁파하고, 내외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칼자루를 내주고 칼끝에 서는 도전에 나서는 자와 기업만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실은 어느 시대나 공통되는 역사가 일깨워주는 교훈이다. #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