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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이순신 |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이순신 수군, 구체적 성과를 내다

by 전경일 2014. 8. 12.

이순신 수군, 구체적 성과를 내다

 

전투다운 전투도 못해보고 밀린 육전과 달리 이순신이 이끈 바다에서는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조선 육군이 막지 못한 일을 수군이 해낸 것이다. 장군은 전쟁이 일어난 임진년 5월에는 당포, 옥포, 사천 전투를, 한 달 뒤인 6월에는 당항포, 율포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율포해전은 특히 장군 스스로 장계에서 여러 전선의 장수와 군사들은 마음이 상쾌했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있는 걸로 봐서 깔끔한 승리로 마무리된 전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 7월에는 한산도, 안골포, 부산포 해전에서 적을 수장(水葬)시켜 버렸다. 한산도로 본영을 옮긴 것은 이듬해인 15932월 웅천와 제포에서 승리를 거두고 남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이었다. 부산을 거점으로 거제도까지 본거지로 삼은 적의 서해 항로를 봉쇄키 위해 옮긴 곳이 이곳 한산도이다. 한산도는 자칫하면 적의 전진 기지인 거제도와 너무 가까워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는 곳이었다. 그만큼 적에게나 아군에게나 전략적 요충지였다. 조선수군이 이곳을 지키는 한 적은 서해를 통해 경기, 서울로 진격해 들어갈 수 없었다. 반대로 적으로선 이곳을 장악하지 못하면 서해 진출은 고사하고 부산까지 잃을 수 있었다. 양쪽 다 반드시 장악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한산도의 전략적 가치: 길목을 지켜라

  

 

한산도는 적이 전라도를 거쳐 서해를 통해 서울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는 수전(水戰)의 최전선이었다. 육지로 보면 진주나 구례와 같이 다른 도로 넘어가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을 장악하느냐 못하느냐는 여부는 전체 전쟁의 판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글로벌 경쟁 하에서 기업들은 한산도와 같은 전략적 거점이 어디일지를 묻게 된다.

 

 

장군은 15938, 당시 편제에도 없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을 무렵 한산도로 진영을 옮긴다. 이때부터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1597226일까지 37개월 동안 이 섬에 진영을 펼친다. 장군은 이곳에서 난중일기1,491일 분의 중 1,029일의 일기를 썼고 많은 시를 남겼다. 장군이 체취가 가장 많이 배어 있는 섬이다. 나는 이 섬에서 우리 역사가 죽고 살았던 치열함을 온 몸으로 느낀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생활 모습. 장군은 이곳에서난중일기1,491일 분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1,029일의 일기를 썼고 많은 시를 남겼다. 오늘날 우리가 장군의 면면이나 임진왜란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장군이 남긴 철저한 기록정신 덕분이다.

 

    

   난중일기: 치열한 기록 정신의 정수

  

   

장군의 활동 중 우리가 본받아야 할 중요한 대목이 있다. 그것은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지는 일과 그 처리 과정을 꼼꼼히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이다. 난중일기는 장군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부터 전사하기 전까지 7년 동안 전쟁 중에 있었던 일을 적어 놓은 30여만 자의 기록이다. 장군의 행적과 시문, 비명(碑銘) 등 여러 가지 관계기록을 집대성한 귀중한 책이다. 세계역사상 지휘관이 직접 쓴 전쟁일기와 전쟁보고서[장계]로는 유례가 없는 것이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공을 세운 부하들을 빠짐없이 기록함으로써 전승의 공이 자신만의 힘이 아니라 조직 전체의 힘으로 이룬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난중일기라는 혁신 기술서에는 3번의 파직과 2차에 걸친 투옥 및 백의종군의 아픔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기록을 남기며 장군은 지도자로서 역량을 키우고 끊임없는 자아성찰의 계기로 삼았을 것이다. 일종의 자가(自家) 피드백 장치였던 셈이다. 기록을 통해 자기혁신을 이뤄낸 장군의 리더다운 모습은 기록에 그대로 남아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거북선에 대한 기술이 불과 700여자의 짧은 요약에 불과하고 구조제원에 관한 기록은 불과 400여자여서 이순신 귀선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장군이 삭탈관직 되어 한양으로 이송된 15961012일부터 1597330일까지 5개월여의 일기가 없고, 159815일부터 914일까지의 일기가 빠져있다. 뒤의 무술년 일기는 분실된 것일 수도 있고, 장군이 몸져누운 날이 많아 일기를 쓰지 못한 것일 수도 있으나 아직까지 그 이유를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장군이 쓴 이 7년 전쟁의 기록은 1793(정조 17) 정조가 이충무공 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의상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서 비롯된다. 전서 권5로부터 권8에 걸쳐 일기를 수록하고 있는데, 현재 국보 76호로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고 있다. 장군에게 영의정이 추증된 것은 전서가 출간된 지 2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지금은 지나가는 나그네도 다도해의 비경에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갓 무친 회와 굴에 소주 한잔으로 회포를 풀고 싶은 곳이지만, 장군이 바라보았던 한산도의 밤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치열한 경계지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적의 동정을 살핀 장군에겐 불면의 밤만이 벗이 되어 주었으리라. 나는 통영이 배출한 시인 이은상이 읊었듯, ‘귀로 듣다 못해 앞가슴 열어젖히고 부딪혀 보는 저 바다앞에서 장군의 초심을 되새기며 장군의 체취를 느낀다. 이순신은 누구인가? 그는 오늘날 경영자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대장부 태어나서 쓰임을 받으면 목숨을 바쳐 충성할 것이요, 쓰임을 받지 않으면 밭을 갈아도 족하리라. 권세에 아부해 한때의 영화를 누리는 것은 나의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다.

 

대장부 이순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장군의 평소 삶의 철학이기도 한 이 말은 이순신이란 존재를 아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순신은 진실로 조선의 대장부였다. 대장부가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이 가득 찼으되 비었으며, 비었으되 가득 찬 기개를 드러낼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따라 배우고 싶은 장군의 이런 면이 무엇보다도 좋다. 대장부의 기개와 분발심이 자연히 가슴에 인다.

그러고 보니, 한산정은 이순신 장군이 활을 쏘던 곳이며 표적과의 거리가 145m이다. 현충사 옛집에서 본 활터와 과녁의 거리도 140m 아니던가. 바다에서는 거리 감각이 없으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닷물을 사이에 두고 활 쏘는 곳과 과녁을 배치해 활터로 개발했다. 한산도 활터에 가보면 완벽한 준비 태세를 추구하는 장군의 계획이 그대로 읽힌다.

장군은 수많은 기습공격으로 적의 야욕을 좌절시켰지만, 한 번도 적에게 기습 공격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기본에 충실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본은 전략을 공고히 하는 주요 수단으로 지속해서 작용한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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