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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이순신 | 경제전쟁에 승리하라

2차 당항포 해전 등: 승리를 위한 조직력을 확보하라

by 전경일 2014. 9. 11.

2차 당항포 해전 등: 승리를 위한 조직력을 확보하라

 

 

  

삼도수군통제사 사부유서. 1593815일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도수군절도사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 이로써 임란 승리를 위한 일체화된 명령 체계를 갖추게 된다.

      

1593815, 이순신은 충청, 전라, 경상 3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겸 전라좌수사에 임명된다. 선조가 통제사라는 직제를 만든 것은 임란 발발 후 16차례에 걸쳐 해전을 치렀으나, 단일하고 통일된 지휘권이 부재해 생기는 극심한 혼란을 막아보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경상·전라, ·우 등으로 전투력이 분산되어 효율적인 작전 수행에 어려움이 많았다.

 

작전에 임한 수사라 할지라도 다른 도의 군관에 대해 명령할 수 없어서 지휘 체계가 확립되지도 않았다. 이순신은 작전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삼도수군 통제영의 설치를 건의한다. 이는 전쟁 승리라는 단일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현장을 조사 하고, 제기된 문제를 풀기 위한 방책에서 나온 것이다. 요즘 기업용어로 말하자면, 업무개선과 조직혁신을 강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장군이 끊임없이 조직혁신을 통해 적에 맞설 내부조건을 만드는데 특별히 관심이 있었음을 뜻한다. 1593년 초부터 1594년 봄까지 장군은 수군 강화를 위한 제반 조치들을 취한다. 군사 병졸의 생활, 휴가, 규율, 상벌, 함선건조수리, 군량확보, 군사자재 확보 등 일련의 조치들이 취해졌다

 

159434일 경남 진해 당항포 해전(2)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후 임금이 내린 유서에 따라 이루어진 첫 작전이었다. 임금은 유서에서 경은 삼도의 수군을 합하여 적을 격멸하라고 명했다. 유서를 받은 이순신은 이억기 등에게 출전 명령을 내리고, 순변사 이빈에게 약속대로 군사를 거느리고 육지에서 적을 치라는 공문을 발송한다.

 

이 작전이 종료되는 시점에 이순신은 오랜 전란의 피로감과 사천전투의 후유증과 토사곽란 등이 겹쳐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로 아팠다. 이 때문에 직접 진두지휘하지 않고 어영담을 중심으로 적절한 전투 편성과 경쾌선을 이용한 기동 및 기습공격작전을 계획하여 작전을 수행했다.

 

그 해 929일부터 108일 사이에는 장문포 해전이 있었다. 이 해전은 도원수 권율 휘하의 곽재우, 김덕령이 참전한 수륙협공작전으로 수행되었다. 적이 장문포 일대를 중심으로 각 포구마다 집을 짓는 등 장기간 머물 채비를 갖추고 있을 때였으므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과 여러 차례에 걸쳐 출전대책을 상의하고 직접 만나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각 도 지휘관들의 표식을 위한 호의(號衣)까지 지급하며 수행한 수륙협공책이었다.

 

수륙이 서로 호응하여 작전을 수행하려 했으나, 적들이 패를 꽂아 둔 채 도주하여 계획대로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그 패에는 일본은 지금 명나라와 화친을 의논하는 중이니 서로 싸울 수 없다고 쓰여 있었다. 강화협상을 하며 시간을 벌려는 간교한 술수였다. 성과는 미약했지만 관군, 의병과 공동전선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 해전은 큰 의의가 있다.

 

장군은 당항포에서 적선 21척을 불태웠다는 보고를 받고 역풍을 헤쳐 거제 흉도에 이르렀을 때 현감 기효근이 전달한 명나라 군사 2명이 왜적 8명과 함께 보낸 급보를 받게 된다. 적과 화의 교섭 차 웅천에 머물고 있는 명의 선유도사 담종인(譚宗仁)이 보낸 것이었다. 내용은 적의 토멸을 금하라는 해전 금지령을 담은 금토패문(禁討牌文)이었다. 이순신은 격노했다. 담종인이 이 같은 명령을 내릴 수 있던 배경은 선조가 전시작전지휘권을 명에 넘겨준 상태에서 우리를 배제한 가운데 명과 왜 간에 더럽고 은밀한 강화협상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군은 명나라 군사를 즉시 불러 패문을 보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명군의 대답은 작년 11월 도사 담종인 등이 웅천에 도착하여 지금까지 머무르면서 화의를 허락하는 명령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왜군의 여러 장수들이 마음을 돌려 귀화하지 않는 자가 없고 모두들 무기를 집어넣고 군사들을 휴식시키며 그들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너희들 모든 병선들도 제 고장으로 돌아가고 왜의 진영에 가까이 하여 트집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장군은 병중에도 글을 짓고 정사립에게 대서토록 하여 즉시 담종인에게 보냈다. 장군은 다음과 같이 답서를 썼다.

 

왜인들이 거제, 웅천, 김해, 동래 등지에 진을 치고 있는 바, 거기가 모두다 우리 땅이거늘, 우리더러 속히 제 고장으로 돌아가라라 하니, 제 고장이란 어디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고, 또 트집을 일으킨 자는 우리가 아니요, 왜적들입니다. 왜인들이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흉악하고 교활한 적들이 아직도 그 포악스런 행동을 그치지 아니하고 바닷가에 진을 친 채 해가 지나도 물러가지 아니하고 여러 곳을 쳐들어 와 살인하고 약탈하기를 전일보다 갑절이나 더 하온데, 병기를 거두어 바다를 건너 돌아가려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오리까? 이제 강화한다는 것은 실로 속임과 거짓밖에는 아니옵니다.

 

치밀하고 논리 정연한 답서로 장군은 금토패문의 부당함에 대해 당당히 항의했다. 국왕인 선조조차 명나라 장수가 서울에 오면 몸소 찾아가 천장(天將)이라 칭하며 굴신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이순신이 취한 태도는 과연 조선의 장군다운 태도였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