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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정한론(征韓論), 근대 왜구의 침략 연료

by 전경일 2015. 6. 12.

정한론(征韓論), 근대 왜구의 침략 연료

 

조선은 임진왜란 전후 7년간 두 번에 걸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으로 일찍이 볼 수 없던 초유의 전란을 경험한다. “토요토미가 일본을 통일한 후 아시아 대륙을 정복하여 일본 중심으로 조선과 중국은 물론 멀리 인도까지 포함하는 대아시아 제국을 건설하려 한 것은 자체로 망상적 사고였지만 이 지역 민중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잔혹한 왜환(倭患)으로 아타난다. “야심찬 계획의 첫 수순으로 토요토미가 조선을 침공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의 일이지만, 임진왜란은 그때의 침략행위로 한정되어서는 곤란하다. 또한 피해 당사국인 조선만의 문제로 보아서도 안된다. 동북아 3국과 나아가 임란 이후 명의 멸망과 청의 흥기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4국 전쟁적 성격이 있다. 조선은 그 의도가 의심스러워 거절했지만, 임진왜란 시 후금()이 조선에 파병을 제안한 것은 이 같은 점을 잘 드러내 준다. 또한 토요토미의 침략사상이 근대 일본의 제국주의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일본 내 침략사상의 연속성 차원에서 파악해야만 한다.

토요토미의 침략성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토요토미가 스페인 신부 알레한드로·발릭그나노를 통해 인도 부왕에게 보낸 서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본인은 중국왕국을 정벌할 결심을 하였으며 본인의 뜻대로 그들을 예속시킬 것을 의심치 않는 바, 그렇게 되는 날에는 우리들이 더 자주, 편하게 왕래할 수 있을 것이다.

 

1592년 필리핀의 스페인 총독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토요토미는 다음과 같이 엄포를 놓았다.

 

나는 이제 드디어 중국을 정복할 계획을 하고 있도다··· 나는 중국을 섬멸하기 위하여 나의 군대를 보내기로 하였다··· 만일 나에게 복종과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오지 않고 땅에 엎드려 나에게 굴복하지 않으면, 당신들을 모두 괴멸하여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것인 즉,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 같은 토요토미 침략성에 대해 서양 선교사 루이스 포스이스(Luis Frois)는 그 근원을 다음과 같이 꿰뚫어 보고 있다.

 

(토요토미)가 이 일을 수행하다가 죽음을 맞더라도 그가 그런 일을 추진한 일본 최초의 군주로 기억되는 한 그는 죽음도 개의치 않을 것이라는 말은 토요토미 스스로 자기가 대제국을 건설해 보려고 한 최초의 일본인이 될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또 이 사실이 그가 그러한 야망을 갖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여실히 알려줍니다. 뿐만 아니라, 토요토미가 다른 아시아 군주들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를 보면, 더욱 확대된 그의 세계관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토요토미의 영토욕은 침략 대상으로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권 전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일본 측 기록인풍감(豊鑑)에서는 토요토미의 침략 사상이 고대 일본의 신국(神國)사상과 이어져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토요토미가 생각한 것은 일본이 다른 나라를 공격한 일은 진구(神功)황후가 삼한을 정벌한 이후 아직 듣지 못한 것으로··· 삼한에 군대를 보내고, 마지막 대까지도 우리나라(일본)의 영토로 만들고 싶다.

 

토요토미는 침략 사상의 원형을 왜곡된 고대 일본사에서 찾고 이를 갱신하고자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토요토미가 임진왜란 시 출정을 하며 침략의 본거지인 히젠(備前), 나고야(名護屋)로 가던 도중에 이즈하라(嚴島)의 신사에 참배해 전승을 기원하고, 조슈(長州)의 국부를 거쳐 주아이천황(仲哀天皇), 진구황후의 신사에 참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곳이 오랜 한반도 침략의 필수 코스였던 것이다. 또한 침략을 위한 의례였다. 나고야에서 출항할 때에도 토요토미는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鎭信)에게 신들을 즐겁게 하는음악인 기구라(神樂)을 연주케 했는데, 이는 일본의 전통음악으로 궁중과 신사에서 연주되던 곡이었다. 이때 시게노부는 토요토미의 질문에 답하여 진구황후 삼한을 퇴치했다. 그 상서(祥瑞)를 그리워하여, 하치번(八幡)대보살을 우러러 받든다고 하여 토요토미를 기쁘게 했다.

또 침략 전쟁의 진중(陣中)에서는 요시노 진고자에몬(吉野甚伍左衛門)각서에서 일본은 신국이라 하여 진구황후, 여제의 몸으로서 삼한을 따르게 했다고 쓰고 있다. 종군승 케이넨(慶念)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서 일본이 신국이라면 불쌍히 여기는 비를 뿌려 사람을 윤택하게 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이는 선()을 추구해야할 종교인들 사이에서도 신국사상이 뿌리 깊게 내려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후대에 등장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적 전조였다. 토요토미의 조선 침략사상은 에도시대는 물론, 이후 명치정부 이래 현재에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일본의 대외 침략사상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이 같은 토요토미의 전통은 오늘날 일본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신사 참배, 영토 야욕으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일본의 독도 침구는 이런 배경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 7주갑을 맞이한 지금 우리는 조총으로 무장한 채 조선 강토를 침략했던 일본과 모든 면에서 전쟁 같은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근대 들어 일본의 조선 침략과 병탄은 물리력과 침략 사상 면에서 토요토미의 유산을 물려받은 근대 왜구들의 준동으로 일어난 도발이었다. 일본 명치 정부 시기 한반도 침탈을 꾀한 일본이 내세운 정한론(征韓論)’의 배경은 일본인의 대한(對韓) 인식을 다음과 같이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 한국은 동북아시아의 야만국이다.

· 한국을 질책하여 조공을 받아들여 옛날 일본의 성세와 같이 해야 한다.

· 한국은 황국을 멸시한 불구대천의 원수다.

· 한국은 응신천황의 삼한정벌 이후로 일본의 속국이니 유신중흥의 세력을 이용하여 이를 정벌하

고 일본판도로 회복시켜야 한다.

 

이 같은 정한론의 연장선상에서 일본은 그간 왜구식 침략 논리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키워왔다. 1823(순조 23) 일본의 사상가이자 토요토미의 열렬한 숭배자인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우내혼동비책(宇內混同秘策)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세계 만국 가운데서 황국[일본을 가리킴]이 공격해 가장 얻기 쉬운 땅은 중국의 만주 이상 쉬운 것이 없다··· 먼저 달단(韃靼, 몽고족의 한 갈래)을 얻고 난 후에는 조선, 중국도 잇따라 도모해야 할 것이다.

 

사토는 그 방법론으로 함경·강원·경상 3도의 여러 주를 공격하고, 많은 군선을 보내 남해에 이르러서 충청도의 여러 마을을 습격하면 동쪽 일원의 침략에 피곤해진 조선은 남쪽의 여러 고을이 공허해 질 테니 그때 바로 나아 공격하고 대포, 불화살의 묘법을 다하면 여러 성이 모두 바람을 맞아 궤멸할 것이다라며 침구 방법까지 자세히 제시하고 있다. 그는 한반도 동부를 공략하기 위해선 우선 울릉도와 독도를 먼저 치는 공략책을 써야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독도문제가 오늘날 들어서만의 난동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친 공작(工作)의 결과이자, 독도가 왜의 침략 목표이자 한반도 내륙을 치기 위한 거점으로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인식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사토는 이렇게만 하면 옛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들인 조선 침략) 노고의 절반으로도 (얻게 되는) ()은 반드시 옛날의 10배가 될 것이라며 전쟁을 부추기면서 호언장담하고 있다. 근대 들어 일본의 한반도 침략 방법이 임진왜란 때보다 더 구체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간과할 수 없다. 이 같은 사토의 구상은 실제로 훗날 일본 명치정부 들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이후 인천항을 열게 한 뒤, 원산항을 개항케 하는 조선공략책으로 그대로 쓰인다.

 

근대 일본의 조선 인식

개항시기 서구화로 무장한 일본의 세계관에 조선은 중국이나 그 주변지역에 이르기 위한 도상(途上)에 있는 한 나라에 불과했다. 이들은일본서기에 기술된 왜곡된 내용에 의거, 한반도가 옛날의 복속국에 불과한 것으로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임란 이후 200년간 이어진 평화적인 조일 교류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조선은 오로지 아시아 정복을 위한 가장 가까운 나라라는 인식만이 팽배하다.

사토가 말하는 우내혼동(宇內混同)’이란 세계통일을 말하는 것으로 천황을 중심으로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사상을 실현하려는 것이다. ‘팔굉일우2차 세계대전 전 일본의 국시(國是)였던 표어로 천하를 일가(一家)와 같이 한다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뿌리가 되는 침략주의 사상이다. 이는 임진왜란 시기 토요토미의 침략사상을 근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계승해 더욱 구체화시킨 것이다.

사토의 대륙정책론’·‘남진론은 이후 일본 막부 말기의 사상가들에게 그대로 계승돼 히라노 구니오미(平野國臣)정만초책(征蠻礎策)’, 야마다 호고쿠(山田方谷)외정론(外征論)’, 가쓰 가이슈(勝海舟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정한론(征韓論)’으로 발전되며 침략주의 사상으로 구체화된다. 나아가 그의 사상은 일본 명치유신에 성공했던 문하생들에 의해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져 특히 19세기 중반의 열렬한 존황사상가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에 의해 야마도 다마시이(大和魂)’로 이어진다. 요시다의 조선·만주공략론도 침략주의 면에서 이와 배경은 같다. 한반도를 오랜 시간 침구했던 왜구의 본성이 근대 왜구인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뿌리 깊게 박혀 있던 것이다. 요시다는 그가 쓴유실문고(幽室文庫)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조선을 취하고, 만주를 끌어들여, 중국을 제압하()··· 토요토미가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을 이룸과 다름이 없다.

 

이런 주장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깊이 각인됐을 것은 자명하다. 요시다는 침략 방법론으로 사토가 제안한 울릉도·독도 공략책을 조선 침략의 가장 기묘한 책략으로 꼽고 있다. 침구 이유 또한 교역에서 러시아와 미국에 잃은 부분을 조선과 만주에서 토지로 보충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구체적으로 들고 있다. 이는 임진왜란 시기, 토요토미가 조선 전토를 다이묘(大名, 봉건영주)들에게 나누어 줄 시안(試案)까지 만들어 놓고 전쟁을 일으켰던 것과 그대로 일치한다. 이 같은 침략 근성이 근대 일본의 대()조선 침략책의 기조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의 제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등으로 이어져 마침내 한반도 재침이 현실화된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 발상의 연장선상에서 사무라이인 히라노 구니오미(平野國臣)조선조공회복론을 주장하며 먼저 삼한의 쳐서 다시 부()를 임나에 세울 것을 국방론의 핵심으로 꼽고 있다. 조선을 정복하는 것이 일본 중흥의 필수조건으로 인식한 근대 일본은 정한론을 조선 침략의 사상적 연료로 쓰고, 이의 실천을 끊임없이 모색해 왔다. 그 예로 1858년 이후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하며 개항 정책을 추진해 온 일본 막부는 그 무렵, 조선을 (, 오랑캐)’라 칭하고, 서양 제국을 조약국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침략 의도를 사상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는 서구 열강이 제국주의를 문명화로 위장하였듯이 일본도 침략 행위를 문명의 이름으로 위장하고자 한 것이었다.

일본 막부 말기의 고위관리였던 가쓰 가이슈에 의해 제창된 정한론1863818의견으로 상신돼 다음 해 33조선국정 탐색의 의()로 하달되어 실제 행동에 옮겨진다. 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정한론1873(고종 10) 대원군의 강경 대일정책으로 조일교섭이 정체되자, 명치정부 내 조선출병론과 맞물려 조선침략을 정당화하는 사상적으로 쓰였다. 이 자는 다음과 같이 조선 침략의 근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지금의 상태로는 공법상 밀어 붙이면 토벌할 수는 있지만, 이것을 전부 이유 있는 것으로 해야 한다. 천하의 사람들은 아는 바가 없으면 모두 싸울 뜻을 가지지 않는다. (조선이) 교린을 가벼이 한 행동을 책망하고 또 지금까지의 불손함을 바로하게 하고, (일본은) 기왕의 교린을 두텁게 하려는 뜻을 보인다는 구실로써 사절을 보내면, 반드시 그들이 경멸하는 대접을 해보일 뿐만 아니라 사절을 폭살하게 하는 행동을 틀림없이 할 것이다. 그때, 천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조선을) 토벌할만한 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이러한 데까지 이르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란을 바라는 마음을 밖으로 돌려 나라를 흥하게 하는 원대한 전략이다. 물론 구정부[德川幕府]가 기회를 놓치고 무사함을 꾀하다가 마침내 천하를 잃었던 바 그 까닭에 대한 확증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다.

 

사이고의 주장 중 내란을 바라는 마음을 바깥으로 옮겨 나라를 흥하게 한다는 발상은 작은 시비를 일으켜 끝내 전화(戰火)로 몰고 가려는 왜구식 전략과 한 치도 차이 없다.

일본 명치유신기 계몽주의 사상가를 대표하는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친정(親征)준비는 어떠한가?라는 논설에서 다음과 같이 망발했다.

 

만약 전쟁을 하기로 결정한 그때에 이르러 우리들 신하의 충정으로써 외람되게도 (천황의) 친정을 기원하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오라, 비단 깃발이 한번 나부끼면 군사의 사기가 백배하여 국가존망의 갈림길인 군에 있어서 필승의 승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선을 반개국 상태로 인식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했다.

 

내가 조선을 보건대, 예전의 우수했던 병비(兵備)가 지금 허술한 것이 아니다. 예전의 활발했던 사고가 지금 완고한 것이 아니다. 예전의 고상했던 풍속이 지금 비속해진 것이 아니다. 예전의 부강했던 모습이 지금 빈약한 것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의 옛것들이 변하지 않은 것뿐이다. 따라서 조선은 퇴보한 것이 아니라 정체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중국과 조선을 뒤떨어진 후진국으로 보고, 조선에 대한 점령과 보호야말로 조선인민의 행복이라는 식의 후쿠자와의 주장은 조선지배론의 배경이 된다. 잦은 왜구 침구과 왜구적 침략 근성을 제국주의의 연료로 삼은 일본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구한말 우리의 내정이 흔들리는 틈을 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때로부터 1910년 국토를 강점당하기까지 34년간 조선은 일본 근대 왜구들의 침략에 완전 수탈당하는 처지가 된다. 이처럼 일본 근대 왜구들의 침구 사상은 정한론에 뿌리박고 있으며, 이는 21세기 들은 지금 일본 ()왜구들에 의해 계승돼 현재에도 하반도 침략을 위한 사상으로 일본에서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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