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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왜구, 그 질긴 악연의 시작

by 전경일 2015. 7. 8.

왜구, 그 질긴 악연의 시작

 

()의 성장으로 한중일 간에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양태가 벌어졌다. 바다를 무대로 한중일 삼국은 새로운 관계망을 형성하게 된다. 삼국이 처음으로 만나는 지점은 유동성이 가장 큰 바다였고, 바다는 예측 불허의 수단무력에 의해 자기의 욕구를 드러내는 장소로 가장 적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각국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본질과 성향을 드러내게 되는데, 섬에서 대륙으로 별로 전해 줄 게 없었던 일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왜구(倭寇)’라는 카드를 내밀게 된다. ‘왜구(倭寇)’는 이런 배경과 방식으로 한중일 역사 무대에 전격 등장하게 된다.

우리나라 기록에 ()’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삼국사기신라본기 혁거세조이다. 왜구에 대한 기록은 그 뒤에도 끊이질 않는다. 그러다가 왜구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뚜렷이 나타난 것은 414년에 건립된 만주 집안(集安)에 있는광개토태왕비문이다.

 

(영락) 14년에 왜()가 법을 어기고 대방지역으로 침입하여··· 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였는데··· 왜구가 궤패(潰敗)하여 참살된 자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 비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왜구라는 용어가 이미 5세기 전후에 왜인의 침구또는 왜의 침구집단을 뜻하는 고유개념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왜구라는 말은 왜인들의 구도(寇盜) 집단’, 도적떼를 말한다. 실로 오랜 세월, 일본은 불명예스러운 명칭과 동격으로 취급받거나, 별칭을 달고 살아온 셈이다. 이는 일본으로서는 상당히 거북스러운 명칭일 것이다. 생각해 보라. 과거 불한당이 세상이 바뀌어 존경도 받고 싶고 위엄도 드러내고 싶은데, 과거의 전력(前歷)이 계속 꼬리표처럼 따라 다닌다면 어떻겠는가? 그러니 일본으로서는 왜구라는 이미지를 어떻게든 지우고 싶을 것이다. 만일 지워지지 않는다면, 계속 거짓 주장함으로써 거짓을 진실로 믿게 만드는 방법 밖에는 없다. 일본이 자행하는 역사 왜곡의 방식이 이것이다.

 

나아가 피침략국()의 머리 속에서도 자신의 만행을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이 같은 노력은 어떤 효과도 발휘할 수 없었다. 그 예로 19108월 조선이 강제 병합된 후 조선총독부 기관지경성일보(京城日報)의 감독이었던 도쿠도미 소호(德富蘇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아주 곤란한 것 중의 하나는 조선전쟁의 기억이다. 대체로 모든 조선인은 조선전쟁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의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조선전쟁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비석, 무덤이나 서적 혹은 구비전설 등이 셀 수 없이 많다. 이러한 기념물들은 전부 없애려고 해도 도저히 불가능할 만큼 많이 있다.

 

일본은 침략의 기억을 조선 인민에게서 지우고자 모든 방법을 동원했으나, 조선 민중의 머리에서 기억을 완전히 없애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는 오늘날 한국인이 지닌 일본()에 대한 감정의 근간을 이룬다. 그 만큼 일본의 만행사는 크고도 깊다

 

일본은 이처럼 왜구이미지를 애써 지우고자 했으나, 일본이 별로 고민할 여지도 없이 왜구라는 용어는 어느새 급속히 퍼지며 역사적 용어로 고착된다. 우리 역사에서는 고려 말에 이르러 왜인들에 의한 약탈 행위가 더욱 빈번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특히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 왜구의 약탈행위가 심해지면서 그 행위의 주체인 일본인 해적선 집단에 대한 총칭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보다 공고화해 진다. 일본으로서는 자신의 불법적 행동으로 인해 불량국가의 이미지를 업보로 짊어지게 된 셈이다. 이 점은 일본 역사에 줄곧 나타나는 콤플렉스의 주요 퍼즐을 이룬다. 물론 그 같은 열등감의 내용물은 평화적 국제 관계로의 전환이 아니라 지속적인 왜구 침구 행위로 나타난다. 이로써 일본은 자기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역사 왜곡에 몰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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