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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일본발(發) 왜구’의 발호-세계제국 ‘원’의 침공

by 전경일 2015. 7. 29.

일본발() 왜구의 발호-세계제국 의 침공

 

이처럼 왜구를 무한 복제해 내는 일본 내 속사정은 무엇이었을까? 왜구가 우리나라에 대거 침구한 때는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시대와 남북조시대였다. 일본 중세에 해당되는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했다. 가마쿠라에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는 1185년 헤이시가(平氏家)를 멸하고 전국적인 지배망을 구축하게 된다. 이때 막부는 수호와 지두(地頭)의 제()’를 실시한다. 수호(守護)란 모반, 살인자 등을 관장하는 관리를 뜻하고, 지두란 장원의 관리, 조세의 징수, 치안의 유지를 맡아 보는 직책을 말한다. 이는 미나모토노가 내란에 참가한 무사 계급을 주종 관계로 묶어 지배 질서를 확립한 것을 뜻한다.

 

그러다가 그가 죽자 정권은 처가 쪽인 호조씨(北條氏)에게로 넘어간다. 호조씨 또한 무사계급의 지지를 받은 세력이었다. 호조씨는 조큐의 난을 거치는 동안 체제를 더욱 굳혀 전제화를 강화하고, 독재 권력을 거머쥐게 된다. ‘조큐의 난이후 일본 조정은 막부에 완전히 종속돼 막부는 조정을 감시해 황위 계승 문제까지도 관리했다. 막부를 무서워 한 일본 조정은 이제 세세한 부분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보고하는 등 막부의 눈치를 보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1274년 여몽연합군이 일본정벌에 나설 때까지는 정치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런데 호조씨의 호조 도키무네(北條時宗)가 집권을 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의 일본정벌을 계기로 원의 외압에 대항해야 하는 중대 난관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 무렵 막부의 동원령으로 원병(元兵)과 싸운 어가인(禦家人)들은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상태였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시 어가인들이 취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어가인의 의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군역(軍役)이다. 그런데 그 비용은 각자가 부담하게 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전에는 전쟁을 치르고 나면 상대의 영지를 빼앗음으로써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바다를 건너 온 몽골의 침입을 막은 전역(戰役) 비용은 어디서고 보상 받을 길이 없었다. 이는 2차 여몽연합군을 격퇴시킨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이들이 부담해야 할 전역 비용은 줄지 않았다. 원군(元軍)이 다시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어가인들은 오랫동안 규슈 연안 일대를 경비해야만 했다. 그러자 비용면에서는 전쟁을 세 번이나 치르는 꼴과 같았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몽골의 세계제국에 편입될 것을 거부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여몽연합군은 12741차 원정을 단행한다. 원 세조의 명으로 원군(元軍) 2만 명, 고려군 8천 명의 병력에 전함 900 척 규모로 1274106일 합포를 떠나 대마도를 공략하고 이키(壹岐)를 거쳐 북큐슈(北九州)의 하카타만(博多灣)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일본군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데다 때마침 폭풍우가 몰아쳐 전함은 좌초되고 많은 병사가 익사하는 사태가 속출하여 귀환하고 만다. 1281년에 단행된 2차 원정에는 총 병력 4만 명(원군 3만 명, 고려군 1만 명)에 전함 900 척의 규모로 합포에서 출정하였고, 별도로 멸망한 남송의 군대인 강남군도 10만 명에 3,500척의 배를 동원하여 이에 가세하기로 되어 있었다. 준비 과정에서 고려의 충렬왕은 직접 합포를 방문하여 출정 준비를 독려하는 등 적극성을 보였으나, 2차 원정 역시 작전 실패와 또 다시 태풍을 만나 10만의 병력 손실과 함께 실패로 귀결되었다. 1863년 대마번사들이 일본 조정에 보낸번정설명서(藩情說明書)에서 이들은 문영~응영년 사이(1264~1427) 외이(外夷)의 침략이 10여 차례 있었으나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으니 대마의 방비가 전에는 완벽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정벌은 한반도가 몽골 강압 하에 처음으로 여몽연합군을 구성하여 일본 본토를 공격한 첫 사례였다.

 

 

군역 동원에 대한 보상은 전쟁에 참가한 어가인 뿐 아니라, 전승을 기원한 사찰도 요구했다. 그때마다 막부는 임시방편으로 대응했다. 그러다 결국 마침내 보상할 수 없다는 선언을 하게 되면서 이를 계기로 어가인과 막부의 관계는 약화되고 이 틈을 타 막부타도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로 인해 가마쿠라 막부는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高氏)와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에 의해 150년 만인 1333년에 망하고 만다. 

 

가마쿠라 막부가 망하자 고다이고(後醍醐)천황은 국정을 직접 관장하고, 지방에 천황일족을 배치하며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이를 당시의 년호를 따 겐무(建武)의 중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천황의 친정(親政)은 아시카가와 닛타 간의 세력다툼과 공가(公家)과 무가(武家)의 반목으로 세력 쟁탈전이 되어 3년이 못가서 멸망하게 된다.

 

천황 중심의 전제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고다이고(後醍醐)천황에 불만을 품어 중흥 정부를 멸망시킨 뒤 교토(京都)를 장악한 아시카가는 천황가의 두 계통의 대립 관계를 이용해 고묘(光明)천황을 천황 자리에 앉혔다. 그러자 고다이고천황은 1336년 교토를 탈출하여 남방(南方)지역인 요시노(吉野)에서 천황의 정통성을 주장하게 된다. 이때부터 교토의 북조와 요시노의 남조가 대립하는 남북조쟁란기가 시작된다. 이때 남조가 자리 잡은 요시노는 지리적으로 방어가 용이한 지역이었다. 게다가 상인층의 적극적인 지지로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교토에 위치한 북조의 세력이 더 안정되어 대세는 북조 쪽으로 기울어 갔다. 이 같은 남북조시대는 57년간 계속되다가 남조의 고카메야마(後龜山)천황이 북조의 고코마쓰(後小松)천황에게 양위하는 형식으로 1392년 남북조 화합은 이루어진다.

 

그런데 남조의 멸망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남조의 지신이었던 북황씨(北皇氏)의 일족이 바다에 들어가 해적이 됨으로써 일본 해적의 발달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 같이 불안한 일본 정국은 왜구를 더욱 창궐케 하는 요인이 된다. 또한 일본 내 혼란은 고려와 일본과의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혼란의 시기 한반도와 중국의 해안지대에 출몰하며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한 해적 집단이 바로 왜구(倭寇)’인 것이다.고려사에 등장하는 극악무도한 경인년(1350) 왜구는 바로 이들을 가리킨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