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일본발(發) 왜구’의 발호-료순의 정치공작

by 전경일 2015. 10. 20.

일본발() 왜구의 발호-료순의 정치공작

 

1350경인년 왜구이후, 1360년대에는 왜구가 다소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이 시기를 지난 1372년부터 고려에 왜구가 갑자기 크게 출몰한다. 그 무렵 일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 시기는 1371년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이 규슈 단다이(九州探題)로 내려온 다음 해라는 특징이 있다. 왜구 재출몰은 이와 관련있다.

 

일본에서는 남북조 내란 말기에 북조(北朝)3() 쇼군 아시카라 요시미츠(足利義滿)가 남조가 장악하고 있는 규슈를 탈환하기 위해 1370년 이마가와 료슌을 규슈 탐제로 임명한다. 탐제(探題)란 일본 무로마치(室町) 막부 시대 주요 지방을 다스리던 지방장관을 말한다. 다음해 료슌은 일족의 장군들과 함께 규슈에 상륙해 이곳의 지방무사들을 장악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또 막부의 공적인 관료로서 탐제의 권한을 십분 활용해 수호(守護)들을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등 동시 전략을 펼친다. 이는 규슈를 지배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그런데 1375년 료순은 가마쿠라시대부터 규슈 지역에서 대를 이어 수호직(守護職)을 맡아 오던 정적(政敵) 쇼니씨(少貳氏)의 쇼니 후유쓰께(少貳冬資)를 유인해 암살하게 된다. 이 같은 료순의 행위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돌출행동이었다. 이는 규슈에서 독자적으로 강력한 전제권력을 만들고자 한 료순의 정치 공작에 의한 것이었다.

이런 사태로 일본 내부는 심리적 불안감이 더욱 커지며 정국이 혼란해지고, 그 결과 규슈 지역에서는 자기 지역을 이탈한 () 단다이(探題) 세력이 생겨나 다음 해부터 왜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해상 무사단과 통제에서 벗어난 해적, 악당(惡黨)들의 활동이 활발해진다. 일본 내 정국 불안이 왜구를 생산해 내는 거대 시스템으로 발전하고 작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을 밑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1374년부터 왜구가 더욱 창궐하자, 고려는 이듬해 2월 라흥유를 사신으로 교토에 파견했다. 그는 승려 양유(良柔)와 함께 그 해 10월에 돌아오는데, 돌아 올 때 천룡사 승려 주좌(周左)의 서신을 전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해일로(西海一路)에 규슈의 난신들이 할거하여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은지가 20여년으로 조정에서 토벌하도록 장수를 보내어 그 지방 깊숙이 들어가 양쪽 진영이 날마다 맞붙어 싸우고 있습니다.

 

이 내용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규슈 일대가 탐제였던 잇시키 도유(一色道猷)가 퇴각한 뒤로 가네요시친왕(懷良親王)이 이끄는 남조가 할거 하고 있는 점이다. 이에 막부는 1370년 규슈탐제 료슌을 보내 토벌하도록 했고, 그 결과 두 세력이 날마다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 무렵 규슈지역은 정치적 격변과 전투상황이 매우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결국 일본 내 권력 쟁투가 자기 소재지를 이탈한 해상세력을 만들어 냈고, 일본 서부지방의 연해민들이 왜구로 변신한 까닭에 왜구가 급증하게 된 원인인 셈이다. 이처럼 일본 내 남북조 쟁란은 왜구 발호의 주요 요인이 된다.

 

쟁란이 끝난 뒤로도 왜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1392년 남북조 쟁란이 북조의 승리로 끝나자, 여기서 패한 남군의 잔당들은 다시 해적의 무리나 무력에 기반한 상인이 되어 인접지역과 국가에 침입하고 있다.

 

일본 내 왜구 발호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른 분석도 있다. 그 중 하나는 여몽연합군이 일본 정벌에 실패함으로써 일본 서부 지방민들의 자만심을 북돋워 주어 왜구가 크게 늘었다는 주장이 있다. 또 고려와 통교 관계가 단절됨으로써 물질적·문화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비정상적 방법으로 약탈을 자행하게 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이 모두 왜구 발호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으려는 시각에 불과하다. 본질적으로 왜구 발호는 일본 내 사정에 크게 기인하는 것이다.

 

한중일 간 오랜 구원(舊怨)의 원천이 되어 온 왜구, 이 약탈집단은 이렇듯 일본 내 혼란에 기인한다. 남북조 시대 일본 정국의 혼란은 왜구를 무차별로 생산해 내는 거대 공장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약탈한 약탈물들은 결국 약탈의 공급과 소비라는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최종 소비처인 일본 곳곳으로 흘러들어가 일본 경제를 돌리는 동력이 되었다. 이는 중세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나, 근대 일본의 제국주의가 조선과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각국에서 막대한 인명과 자원을 약탈해 전시(戰時) 일본 경제를 돌렸던 것과 같다.

 

이점에서 볼 때 역사는 늘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들어서도 일본 내부의 움직임에 주변국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발() 혼란으로 인한 침구 상황은 역사 이래 끊이지 않았고, 동아시아 국가들의 불안요소로 상시적으로 작용해 왔다. 이 점에서 왜구 발생에 대한 일본 책임론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왜구뿐만 아니라, 오늘날 일본의 ()왜구가 지대한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