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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왜구의 주체는 ‘도망자 무리’

by 전경일 2015. 12. 30.

왜구의 주체는 도망자 무리

 

왜구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규명하려는 시도가 한중일 간에 있어 왔다. ‘왜구라 함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킬까?고려사는 왜구의 주체 세력이 누군지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일본 사신이 고려를 방문한 것은 공민왕 17년인 1368, ()의 승려 본토(梵盪)와 본류(梵鏐)가 방문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왜구 금지[禁寇]를 요청하는 고려 정부의 공식 문서에 대한 회답[回書]을 가지고 왔는데, 그 내용은 지금 남아 있지는 않다. 다만 그로부터 9년이 지난 1377(우왕 3) 6월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안길상(安吉祥)이 일본에 갈 때 가지고 갔던 첩장(牒狀)을 통해 그 내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첩장에는 고려 금룡(金龍)이 일본을 방문한 것에 대한 회답으로 왜측의 세이이 다이쇼군(征夷大將軍)이 왜구를 금지할 것을 약속했고 그 결과 왜구가 줄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왜구도(倭寇圖)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에서 소장하고 있는왜구도권(倭寇圖卷)중 일부. ‘왜구()’()’의 합성어이다. ‘라는 글자는 고대 일본에 대한 호칭으로 서기 기원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서에서 쓰여져 왔다.떼도둑(群賊)’ 또는 겁탈함(劫取)’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왜구라는 단어는 왜인들의 집단 도둑 행위’, ‘왜인들의 도둑 집단내지 일본에 의해 저질러진 침구 행위를 총칭하는 말로 쓰인다.

 

왜구를 가리키는 명칭도 다양하다. 중국 측 사료에서는 왜구를 진왜(眞倭), 왜적(倭賊), 왜노(倭奴), 구왜(句倭), 잔구(殘寇), 적범(賊帆), 황이(荒夷), 위왜(爲倭), 가왜(假倭), 장왜(裝倭) 등으로 부르고 있다. 때로는 규슈(九州)와 시코쿠(四國)의 해적들로 한정해 쓰기도 한다. 중국어로 왜구라는 말에는 난쟁이라는 경멸적인 뜻이 내포되어 있다.

 

왜구의 행동 양태에서 파생된 명칭으로는 위왜, 가왜, 장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왜구를 가장한 도적을 뜻한다.고려사에는 왜적, 왜노, 해적, 해도(海盜) 또는 단순하게 적, (), 적선(賊船), 작구(作寇) 등으로 표기되며 모두 구적(寇賊) 행위를 하는 집단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에서는 혼란 시기 왜구를 가장한 가왜(假倭)와 왜구에 의부한 부왜(附倭)들에 의한 피해도 발견되고 있다.

 

왜구는 일본열도 내 바다를 배경으로 활동한 비법적(非法的) 무장 세력으로 오랜 시간 한중일 역사에 약탈의 주역으로 등장해 왔다. 왜구는 여전히 현재성을 띠고 있는 개념이자, 오늘날 일본의 극우주의적 움직임에 따라 평화 파괴적 행동을 동반하는 집단으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일본의 왜구 근성은 그들이 이해하는 무력적 교류’, ‘접촉에 대한 사고와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칫 미래사를 파괴적으로 만들 우려마저 있다. 근현대 들어 나타난 일본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는 왜구식 근성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의 ‘21세기 왜구 근성을 경계하는 것은 이 같은 오랜 침구 경험 때문이다. 일본은 오랜 시간 일본이란 국가 이미지와 중첩되어온 왜구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까?

 

 

고려사는 이들 왜구의 실체를 규슈 지방에서 할거한 사변해도(西邊海道)의 완민(頑民)’ 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완민이란 규슈의 바다를 배경으로 활동하는 거주인을 비롯해 그 지역 일대에 살고 있는 제()세력을 가리킨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1375~6년이 되면 왜구의 주체가 완민에서 포도배(逋逃輩)’로 바뀐다는 점이다. 포도배란 누구를 가리킬까? 말 그대로 도망자 무리를 뜻한다. 따라서 포도배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이후 왜구의 주체는 도망자 집단인 것을 알 수 있다.

 

13818월 일본 막부는 료슌에게 명령해 고려에 건너가 마구 어지럽히는 악당인(惡黨人)’들을 금지시키도록 명령한다. ‘악당(惡黨)’이란 당시 일본 전역에 나타난 비법(非法) 행위를 자행하는 무리였다. 오늘날 우리가 악한 사람의 무리라는 뜻으로 쓰는 악당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들은 자신의 땅을 이탈해 약탈 행위를 일삼았다. 료슌은 왜구로 말미암아 고려가 입게 된 피해를 인정하고, 그 주동자들을 도망자 무리로 밝히면서 규슈탐제의 통제권에서 벗어난 세력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 기록은 악당이 고려에 침구해 왜구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일본에 나타나는 거의 유일해 보이는 왜구 관련 기록이기도 하다. 이는 왜구의 주체를 밝히는데 매우 실질적인 의미가 있다.

 

왜구사를 살펴볼 때면 유독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 오랜 시간 비법 행위를 저지른 집단에 대한 기록이 일본 내에 전무하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일본 학자들이 특정 목적을 갖고 왜구를 연구하고 있지만, 왜구에 관한 자료는 그 행위 주체자가 아닌 피해자 내지 관찰자의 입장에서 기록된 사료밖에 거의 없다. 이 점은 대단히 의심스럽다. 단순히 이런 저런 이유로 기록을 남길 수 없었던 것일까? 그보다는 왜구가 반인륜적 집단이기에 국가적 이해를 해적 집단을 통해 관철해 온 침구의 역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의도적으로라도 지우고자 한 것 아닐까? 이처럼 일본은 자국에 불리한 역사는 은폐하거나, 지워 버린 의심을 받을 여지가 크다. 가해자가 기록을 안 남긴 상황에서 일본이 약탈집단인 왜구의 본질을 왜곡, 호도하는 한 한중일간 역사 인식의 골은 좀처럼 메워지기 어렵다. 역사 왜곡의 뿌리는 일본 열도를 휘감을 만큼 넓고도 깊다.

 

그러고 보면 대체 어느 나라가 자신의 도적 행각을 보란 듯이 기록으로 남길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나마 이런 기록이 남아 있어서 사실 관계를 규명할 수 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일본으로서는 도적떼를 자기 집안사람이라고 인정한 꼴이 되었으니, 왜곡을 지향하는 일본 역사 전개 방식에서 보면 대단히 불리하게 받아들였을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이 존재가 현재 일본 ()왜구의 길고 긴 연원을 따지는 증거가 되고 있느니 만큼 일본으로서는 어지간히도 속상할 법도 하다.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