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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동아시아 전체의 골칫거리, 왜구

by 전경일 2015. 12. 30.

동아시아 전체의 골칫거리, 왜구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직접적인 접점에 놓여있다. 이 점은 양국 관계에서 불가피한 지리적 여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가까운 거리라는 이유로 문명사적 교류도 활발했지만, 그로 인해 한반도는 왜구 침구의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어 왔다. 14세기 중엽부터 고려는 반원자주운동을 추진했으나, 40여 년 동안 계속된 홍건적의 침입은 서북지방으로부터 개경에 이르는 연도 인근의 제읍(諸邑)들을 모조리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먹을 것이 없는 극도의 기아 상태에서 백성들은 죽은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을 정도로 비참한 삶을 이어 갔고, 시체를 파먹은 개들은 미쳐서 개경 시내를 어슬렁거릴 정도였다.

 

홍건적에 의한 피해도 컸지만, 왜구에 의한 침입과 피해는 이보다 규모나 횟수면에서 더 컸다. 왜구 출몰지역의 농어민들은 약탈과 살육을 피해 내륙으로 이주했고, 이에 따라 해안지역은 무인지경이 되어버렸다. 국토의 가장자리가 도륙 당했고, 침구 지역은 내륙으로 확대됐으며, 학살당한 백성들의 피로 강물이 넘쳐났다. 이에 고려는 방어태세를 점차 강화해 그 결과 1389년에 이르면 왜구는 돌연 그 침구 방향을 중국으로 돌린다. 그 무렵 중국으로 가는 원거리 항해에 부담을 느끼면서 왜구가 중국 해안지역을 침구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처럼 고려의 방어 태세가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침구 방향을 돌렸다고 해서 왜구 침구가 근절된 것은 아니다. 일본열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왜구에게 식량 등이 부족할 시에는 중간보급기지가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중국과 일본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고려는 항시 왜구 침구의 대상이 되었다. 왜구로서는 한반도가 반드시 취해야 할 전략적 침구거점이었던 것이다. 왜구는 점차 약탈대상지역을 고려 내륙지역으로 확대했고, 그로 말미암아 해상 교통망과 세금을 운반하는 조운(漕運) 기능은 사실상 마비되어 버린다. 이는 결국 고려 조정으로서는 지방으로부터 조세를 징수하지 못해 국가 재정이 파탄나는 주요 요인이 된다. 침구에 따라 식량난도 극도로 심각해 졌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의 삶은 매일 매일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만 했다.

 

고려는 14세기 말엽까지 가까스로 왜구의 침략 위협을 극복할 수 있었지만, 끝내 왕조는 쇠락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침내 기진한 고려를 대체해 조선이 새로 개국되며 ()왜구전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왜구의 침구를 받기는 조선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이 개국되었어도 왜구의 침구가 잦아든 것은 아니다. 고려는 해변의 섬들이 적의 기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섬 주민을 뭍으로 이주시켜서 비워 버리는 이른바 공도정책(空島政策)’ 차원에서 해금책(海禁策)’을 취했는데, 조선도 같은 정책을 이었다. 1371왜환(倭患)’에 대해 명() 정부가 취한 기본 정책도 해금책이었다. 이로써 조선과 명은 피치 못하게 함께 해금(海禁)시대를 본격 개막하게 된다.

 

본래 이 정책은 내국인이 왜구와 내통하는 것을 막고 사무역 하는 걸 금지하기 위해 대내적 통제책 차원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따라 명 조정은 연해와 도서 주민을 내륙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그런데 당초 의도와 달리 해금책은 중국의 해양무역을 저해하고 생활 터전을 잃은 해안 주민들이 어쩔 수 없이 불법적으로 해상활동에 뛰어 들게 한 면이 있다. 또 바다를 비움으로써 해군력의 급속한 약화를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연해 천여 리가 모두 도적의 소굴이 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에 대해 명 정부는 뒤늦게 금구교섭에 나섰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명사(明史)》⟨일본전(日本傳)에는 왜구로 인해 명이 처한 위급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왜인이 매년 상습적으로 침략하였고, 연해의 간악한 무리들도 왕왕 그들과 결탁하였다··· 바다의 큰 도적들은 왜의 복식을 하고 깃발을 휘두르며 배를 나누어 타고 내지를 노략질해서 큰 이익을 취하였기 때문에, 왜의 환란이 날로 극성해졌다··· 그때 외적의 세력이 만연하여, 장저(江浙)지역은 유린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왜구로 인해 바다를 포기하는 수세적인 방법으로는 왜구를 근절시킬 수 없었다. 바다를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근본적인 대책은 사라지고 더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한편, 우리로서도 육로 중심의 정책을 취함으로써 해양으로 뻗어 나가는 기상이 어느새 사라지고만 것이 가장 큰 손실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조에 들어서면 대외 관계에 있어서 오로지 육로로 명()에 사신을 보내 대국으로 섬기면서 중화문화의 아류임을 자처하게 된다. 실로 통탄할만한 일이었다.

 

왜구 침구로 우리가 입은 가장 큰 폐해는 무엇이었을까? 문화적 자폐주의(自閉主義)에 빠져 해양을 통해 문화의 다양성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것이다. 대신, 중화의 권위를 빌어 내지(內地)의 백성들을 통제하는 획일적인 안정성을 추구하는 것에 서서히 길들여져 갔다. 이처럼 동아시아의 해양은 왜구 발호로 인한 해금책의 영향으로 조선과 명에 의해 철저히 외면당했고, 이는 일본의 비법적·불법적·탈법적 행동을 더욱 방관·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해금책은 해외와 문물교류를 해야 국가 자체가 운영될 수 있는 일본으로서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륙과의 교류에 의해 국가적 유지와 발전이 수혈되어 온 섬나라 일본으로서는 심대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본래에도 그 본질이 평화를 가장하면서도 침략을 근성으로 하던 왜로서는 보다 일탈적 세력을 방조하고, 후원하게 된다. 그리하여 일본 내 불량 집단은 점차 해양 침략세력으로 발전해 간다.

 

왜구 침구 행위가 큰 문제가 되자 조선과 명은 방향을 선회해 무력 징벌과 함께 제한적 해양교류라는 회유책을 통해 왜구 침탈을 통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한된 정책으로는 왜구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었다. 왜구의 욕구가 무한대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조선과 명은 그들이 일으킨 크고 작은 도발을 감수해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이른바 왜변(倭變)’이니 왜란(倭亂)’이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 중 특히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한때 조선왕조를 존망지로에 처하게 할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 국제전쟁이었다. 이는 조선과 명이 취한 해금책이 오히려 양국의 목을 조이는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왜구 발호를 막기 위한 조치로 취한 해양 차단의 결과, 수군이 전무하다시피 하여 왜구 침구에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처럼 조선은 철저히 해금책을 실시했지만, 그 빈틈을 해양 침략세력인 왜구는 강력한 도전으로 대응해 왔다. 그리하여 왜구의 지속적인 침구는 마침내 임진왜란이라는 대전쟁의 참화를 빗기에 이른다. 그나마 남해에서 왜의 숨통을 끊어 버린 이순신의 활약상에 힘입어 임진왜란 실질 전투는 종식되고 말지만, 그렇다고 왜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힌 것은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이순신이 숨을 거둔 직후인 15981221일 전라도 관찰사 황신(黃愼)은 대마도를 쳐부수어 훗날의 근심을 없애자는 대마도 정벌론을 주청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부는 3일 후 항왜병 소기(小棄)와 조선인 박선을 왜인으로 위장시켜 대마도에 정탐 차 보낸다. 그러나 이듬해(1599) 24일까지도 이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선조의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대마도 정벌론은 등장하지 않는다. 미온적 전쟁 종결로 화근을 그대로 남겨 두었던 것이다.

 

이렇게 끝나지 않은 전쟁은 그 질긴 명맥을 유지하다가 300년 후에 일본의 조선 재침으로 나타난다. 이는 왜구를 막기 위한 소극적 정책이 더 크게 왜구 발호를 가져오고, 그 결과 국가 차원의 전란 사태로 커져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왜구의 불씨를 잡지 않음으로써 국가적 전란으로 확대되는 양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의 모르쇠전략

 

왜구 활동에 대해 공식적으로 일본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고려 정부의 왜구 금압 요구를 받은 일본 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왜구 문제에 대해 자국의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금압을 요청하는 고려 측의 주장에 대해 일본 조정의 공식 입장은 회답하지 않고 막부의 처리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조치의 일환으로 일본 정부는 13681월 중 승() 본토(梵盪)와 본류(梵鏐)를 고려에 보빙사로 보내 막부의 회답공문을 바쳤다. 하지만 막부의 회답은 고려 정부의 기대와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왜구를 금지하겠다는 적극적 의지라기보다는 왜구가 규슈, 시코쿠(四國) 등지에 할거 하고 있는 무리들이어서 교토의 막부로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당시 아시까가 막부는 규슈나 시코쿠의 영주들이 조종하는 해적떼를 다스릴 수 없었다.

 

이 같은 막부의 태도는 양국 관계에서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주변국의 왜구 금지 요구에 대해 막부는 어떤 이해도 갖지 않았고, 특별히 영향력도 발휘하지 않았다. 다만 외교적 수사(修辭)로 상황을 모면해 보려는 시도나 상황 전변을 기대하려는 소극적 행동이 전부였다. 막부는 조정을, 조정은 막부를, 막부는 다시 영주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면피로 일관한 셈이다. 이는 조선과 외교 관계에서 막부가 일본국을 대표해 온 점과 천황의 지위가 막부의 감시 하에 있기도 하는 등 일본 내부의 문제점 때문이기도 하다. 즉 국왕이 실권자였던 우리 권력구조와는 다른 일본 정치체제의 이중 구조이기도 하지만, 일본이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 측 주장처럼 왜구 발생 책임은 영주들의 몫임으로 막부와 일본 조정은 왜구 책임론에서 벗어나도 되는 것일까? 왜구와 천황과의 관련성은 그로부터 500년 뒤인 1868년 명치천황으로 불리는 일왕 무쓰히토(睦仁)의 발언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때 무쓰히토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기리는 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를 교토에 조영할 것을 지시했는데, 신사 재흥(再興)을 위한 명령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도요토미 다이코(太閣,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천했지만 아무런 도움도 없이 천하의 어지러움을 바로잡았으며, 옛 성현들의 위업을 계승하여 받들고, 황위를 해외에 선양하고, 수백 년 후 또한 저들(조선인과 중국인)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였다.)

 

이는 왜구 침구의 결정판으로 임진왜란을 이끈 배후가 누구인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준다. 일본 권력 구조가 이중성을 띠고 있으므로 드러나지 않는 때가 많지만, 결국엔 침구 세력의 뒤에 천왕이 있는 것이다. 당시 무쓰히토 천황이 조성케 한 도요쿠니 신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126천명의 귀와 코를 베어다 묻은 이총(耳塚)’ 에서 불과 100m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에 도요쿠니 신사를 짓게 함으로써 천황은 근대 일본 제국주의가 토요토미의 침략성을 계승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다른 한편, 이 귀무덤은 우리에게는 한이 서린 곳인데, 근대 시기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이 귀무덤이 적에게도 자인박애(慈仁博愛)의 정신을 발휘한 증거이자, 적십자 정신의 선구라고 내외에 선전하며, 영문으로 팸플릿을 만들어 해외에도 돌리기까지 했다. 천인공로할 만행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막부시기, 막부에 휘둘리기도 하고 명색뿐이기도 한 면도 있지만, 천황은 막부의 그늘에 숨어서 일본의 침략적 이해를 철저히 대변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본격적으로 막부에서 천황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정권 교체(大政奉還)’가 명치유신인데 근대 천황상이 창출되던 시기, 일왕이 현창하고자 했던 자는 조선 침략의 원흉이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였던 것이다. 이는 중세 시기와 근대 일본의 침략주의가 매우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런 배경에서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장관이었던 기우치 주시로(木內重四郞)는 한일 병탄이 있던 191010나는 도요 공의 신령을 받들어 일본 민족 해외 발전의 수본존(守本尊)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실제로 합방 후인 19182월 그는 앞서 한국을 병합함으로써 일본이 점차 아시아 대륙으로 발전함에 따라 도요 공을 추모하고 그 묘사(墓社)에 참배하는 자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며 의기양양하게 자평하고 있다. 이 같은 배경에서 일본 군부는 합방 전후로부터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 내에 축성한 왜성(倭城)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1935년 들어서 조선총독부는 울산 왜성을 비롯해 11곳의 왜성을 유적지로 제정(1939년까지)해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로 하여금 왜성 보존 활동과 관광 개발을 활발하게 전개하도록 했다. 근대에 들어서도 임진왜란은 여전히 끝나지 않는 전쟁이었던 것이다.

 

봉건 시대 일본의 천황은 하나의 영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왜구 침략에 관해 천황 책임론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천황 책임론이 불식되려면 여기에는 역사적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 근대 명치유신 이후 천황이 국가 원수(元首)이자 군수통수권자로서 절대적 통치권을 행사한 적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현재 일본 헌법이 정하듯, ‘일본국 및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만 국한되어야 한다. 그러나 막부 정권 이후 명치유신기에 접어들면 천황은 대외 침략의 최종 결정자이자, 실행자로 직접 나서서 활동하게 된다.

 

지금의 천황은 상징적 존재이기는 하나 형식상 어디까지나 일본의 최고 통치자다. 우리의 국가원수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카운터 파트너는 천황이었고 신임 주일대사가 신임장을 제정하는 것도 천황이다.

 

이 같은 구체적인 침략행위와 위상은 과거 천황을 역사적 책임과 무관한 존재로써 자리매김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 과거 막부시기에도 지금의 일본 헌법이 정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천황은 같은 위상을 지녔기 때문이다. 집권에 성공한 각 시기 일본 막부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지 않고 천황 일가를 유지하고 관리해 온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막부의 공모(共謀)와 왜구 지원

일본 막부시기, 무용(武勇)을 과시하며 할거한 봉건 영주들은 더 많은 토지와 인민을 차지하기 위해 해적단을 해외로 내몰았다. 그리하여 왜구는 고려를 비롯해 명나라와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 출몰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재난을 가져왔다. 나아가 일본 봉건 영주들과 상인들은 해적떼를 지지하고 조직하기도 했다. 왜구는 이처럼 일본 지배계급과 연관된 해적떼이며 침략 집단이었다. 왜구는 우연적이고 일시적으로 발생한 약탈집단이 아니라, 일본 봉건제도와 상업자본의 발전이 왜곡되며 나타난 필연적 현상이자, 침략의 첨병이었던 것이다.

 

1380년대 중반 이후에 접어들면 왜구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여기에 무슨 까닭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는 일본 내 민간 활동인 잇키(一揆)’야토(夜討해적(海賊) 금지조항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본래 잇키는 이치미도신(一味同心)이라는 연대감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이었다. 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이룰 수 없는 일상성을 초월한 문제나, 현실적 수단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불가능한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에 잇키를 결성했다. 때문에 현실적 조건을 뛰어넘는 존재가 되고자 했다. 잇키는 일본 사회 내부의 문제를 풀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그 간접 여파로 왜구 문제까지 규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일종에 민간 차원의 자성적 움직임이라고나 할까? 왜구가 감소한 원인으로 잇키는 이렇게 일부 작용하고 있다. 비록 방법은 미신적이며 종교적 성격을 띤 것이지만, 왜구를 금구시키는 데에는 나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셈이다. 일종에 요즘 시민단체 활동과 같은 것으로, 현재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경화 경향에 대해 양식 있는 시민사회 단체들이 자성의 목소리를 요구하고 있는 것과 성격이 같다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일본 우경화의 해법으로 일본 내 평화 지향의 시민사회 단체 활동을 기대해 본다.

 

오늘날 왜구는 가해자이거나 피해자로서 한중일 각국의 자국사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런 면에서 불행한 과거지만, 역으로 동아시아 공존의 해법을 찾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왜구 문제가 동아시아의 미래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은 이미 20세기 들어 우리가 지난한 고통 속에서 경험해 본 바다. 더구나 이들 근대 왜구“2차 대전을 통해 세계사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는 점에서 보다 근본적인 해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럴 때 미래의 불안요인을 사전에 제거할 수 있다.

 

근대 일본이 지향한 제국주의의 뿌리에는 항시 왜구 근성이 내재되어 있다. 일본이 생산해 낸 왜구 시스템은 실로 면면(綿綿)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왜구는 특히 한중 양국사와 이 지역 인민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쳐왔다. 왜구는 크거나 작은 도적떼의 잦은 출몰이 끝내 국가적 전란을 예고하고 확산·증폭시켜 왔다는 점에서 매우 중대하게 취급해야만 한다. ‘왜구문제가 과거사가 아니라, 21세기 생존 문제로 다급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왜구 근거지 및 침구도

 

일본 내 왜구의 근거지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이견이 있다. 대개 막부의 통제력이 약했던 일본 연해변의 삼도(三島)를 가리킨다. 삼도는 대마도(對馬이키(一岐마쓰우라(松浦) 세 곳을 가리킨다. 혹은 여기에 시모노세키(下關, 당시 亦間關)를 넣기도 한다. 근처의 고토(五島히라도(平戶북큐슈(北九州시코쿠(四國) 등지의 해적까지 포함해 삼도(三島)왜구로 통 털어 일컫기도 한. 지도 왼쪽 위에서 보는 것처럼 일본 서해 연변은 왜구의 직접적인 본거지였다.

오늘날 일본은왜구 진출지도라고 칭하고 있지만, 왜구의 동남아시아 침범도를 보면 한반도, 중국대륙, 일본열도를 비롯해, 멀리 러시아의 연해주와 동남아시아까지 약탈 무대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와 관련되어서는 특히 고려의 경우, 전 해역이 왜구 침구로 인해 국가의 존립 자체가 어려울 정도였다.

오랜 세월 왜구는 한중일 관계사에서 바다를 매개로 벌어지는 약탈사의 주요 측면을 이루며 삼국 관계를 바다로 확장시켜 바라보는 시점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각기 자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역사상 이처럼 바다를 배경으로 오랫동안 잔학무도하게 약탈을 한 특이한 존재도 없을 것이다. 왜구의 침구 지역은 이후 일본 제국주의 침탈 시기 침략과 점령을 했던 지역과 많은 부분 겹쳐진다. 과거사가 현재사와 분리될 수 없는 관련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바다가 왜 안정되고 평화스러울 수 없었는지에 대한 뚜렷한 방증이 되기도 한다. 일본 내 극우주의가 발호하고 있는 이즈음, 일본은 과거와 달리 이 지역에서 평화의 길을 선택하게 될까?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