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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인문역사/남왜공정

가까운 이웃과 만고불변의 원수-1620년간 계속된 왜구 침략에 과연 끝이라는 게 있는가?

by 전경일 2015. 12. 30.

가까운 이웃과 만고불변의 원수 - 1620년간 계속된 왜구 침략에 과연 끝이라는 게 있는가?

 

1592년 임진왜란 징후 파악과 발발에 대해 조선 정부의 대응은 무능한 것이었다. 인접 국가인 일본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세세히 탐망하고 방비책을 마련했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은 방비를 게을리 한 탓에 임진왜란의 참혹한 전화를 겪는다. 임진왜란 발발 2년 전인 1590년(선조 23년) 3월 조선정부는 왜에 통신사를 파견한다. 사절단의 파견 목적은 토요토미가 전쟁을 수행할만한 능력이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윤길과 김성일간 상반된 정세예측 보고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이 시기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전쟁 준비를 완료해 놓은 상태였다.

 

일본 내부의 사정에도 눈이 어두웠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에 갈 때, 다양한 교섭 대상들을 위한 선물 가지고 갔는데, 그 대상이 된 가문 중에는 오우치, 쇼니, 교고쿠, 호소가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이 네 가문이 이미 권력을 잃고 토지를 상실한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일본인들은 16세기 후반까지도 이 네 가문의 이름으로 조선 국왕에게 조공 사절을 보냈던 것이다. 더구나 포르투갈에서 도입된 조총이 군사 전술상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와 일본 전국시대를 마감한 획기적인 병기이자 조선침략이 현실화될 때 강력한 무력수단으로 사용될 거라는 점도 인지하지 못했다. 이처럼 조선은 대부분 일본 전국시대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게다가 토요토미가 보내 온 서계를 단순히 위협을 가하는 것이라 해석하여 예(禮)로서 설유, 위무하는 방책을 취하기로 하는 등 정세 판단 면에서 패착을 범했다.

 

이 같은 대응은 현실감이 떨어진 것으로 조선이 임란 전 국제 정세에 어두웠다는 것을 드러래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착오와 혼동은 근대 개항기 일본의 노골적인 음모에 대해 조선이 보여준 혼미스런 정세 판단력과도 같다. 결과적으로 임란 이후 300년 만인 1876년 강화도조약을 강제 체결당하게 되고, 1910년 을사늑약을 강요당하면서 35년간 국권 상실의 초비상 사태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왜구의 잦은 침구의 결정판인 임진왜란은 조선의 전국토를 황폐화시켜 버렸고, 동아시아 세계 질서를 재편했다. 국제전쟁화 된 후유증으로 중국에서는 명(明)에서 청(淸)으로 왕조가 바뀌었고, 침략국인 일본에서는 임란의 원흉인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이 들어서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한중일 삼국의 국민 간에 커다란 상호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런 인식은 2차 대전시 일본의 만행이 가중되며 오늘날 한․일 간 뿌리 깊은 갈등의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모든 면에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이후 한중일 삼국은 국가 구성원들이 갖게 된 인식이나 국제관계 등 모든 면에서 다시는 임진왜란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었지만, 우리가 행한 반성은 함량 미달되는 것이었다. 조선은 임란 전 일본의 움직임을 주청사를 파견해 명나라에 보고했듯 임진왜란 이후 도쿠가와 정권과 교섭할 때에도 끊임없이 명에 보고하는 등 줏대 없는 짓을 행했다. 그러며 한편으로는 일본에 대해 ‘백년을 두고도 잊기 어려운 원수(百世難忘讐)’, ‘만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원수(萬世不忘之仇)’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일본에 대한 불신감, 광포하기 이를 데 없는 무용, 문물을 약탈하고 파괴한 조속성에 대한 증오 등이 한민족의 일본관의 본질로 자리 잡게 된다. 이 같은 심적 대응은 실질보다는 감정적 대응이 강하는 점에서 인화성은 강하지만만, 지속적인 현실 차원의 대응력은 뒤떨어진다는 단점과 위험성이 있다. 이 점은 우리가 철저히 반성해야 할 점이다. 요는 감정적 면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현실 대응력인 것이다.

 

임란 이후 중국의 대일관도 뚜렷이 기조가 세워졌다. 중국의 대(對)일본관은 지독하게 나쁘게 형성돼 “왜놈은 교활하고 거짓되어 헤아리기 어렵다” 일본군은 “탐욕적으로 약탈하였다”는 등 부정적 인식이 대세다. 일본의 침략적 본성이 여과 없이 중국 민중들 뇌리에 틀어박힌 결과다. 여기에 2차 대전시 남경대학살 등 참혹한 살육 경험은 중국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일본인의 이미지를 심어 놓았다. 이는 어느 누구의 탓이라기보다 철저하게 일본의 만행이 불러온 결과였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이 지닌 ‘만고불변의 원수론’에 대한 ‘일본 책임론’은 피할 길이 없다.

 

우리로서도 지난 역사를 통해 철저히 반성해야 할 것이 있다. ‘한․일전(韓日戰)’ 때마다 극명하게 드러나듯, 오랜 시간 우리가 지녀왔던 심리적 우월 의식이나, 극일(克日)의 당위론적 인식내지 보상심리가 채워진다고 해서 문제의 해법을 찾게 되는 건 아니다. 일본이 유지해 온 ‘왜구 근성’은 전란을 쉽게 잊고 마는 우리의 약점을 항시 허점으로 노려왔고 이용해 왔다. ‘독도문제’를 둘러 싼 군대 주둔 여부로 한동안 국가의 최대 문제와 관련되어 통일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점이 왜구 문제를 살피며 자성적 목소리로 경계해야 할 바다. 자칫 경솔하게 굴다간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불장난에 말려들어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 전체가 일본 ‘재침론’의 전화에 휩싸일 위험성마저 있다.

 

일본으로서도 ‘만고불변의 원수론’을 불식시키고 ‘가까운 이웃론’으로 동아시아 국가와 관계설정을 위한 노력을 다 하여야 한다. 내부적으로 21세기 ‘신(新)왜구’를 단속하지 못한다면 2차 대전 패망의 결과가 보여주듯 그 결과는 일본(민)들의 불행으로 직접적으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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