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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사랑한 대왕, 세종

by 전경일 2016. 4. 20.

세종과 장영실의 혁신 리더십

 

수학을 사랑한 왕 

 

세종 121023일 기록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임금이 계몽산(啓蒙算)’을 배우는데, 부제학 정인지가 들어와서 모시고 질문을 기다리고 있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수(算數)를 배우는 것이 임금에게는 필요 없을 듯하나, 이것도 성인이 제정한 것이므로 나는 이것을 알고자 한다.’고 하였다.”

 

실록에 의하면, 세종은 수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 걸 알 수 있다. 세종은 왜 수학을 배웠을까?

 

간단히 말하자면, 과학 발명품 때문이었다. 세종이 추구하는 신생 조선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과학과 기술이었다. 그런데 왜 그 시기 과학 기술이 특별히 강조된 것일까? 그 이유를 따져 들어가 보면 결국엔 국가를 운용하는 철학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유교적 이념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은 그 이상에 충실했는데, 유교적 철학 원리에 의하면, 국왕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는 (‘대천이물(代天而物)’ 사상)’존재이다. 그것이 군주가 된 이유이다. 그런데  하늘이란 바로 백성을 뜻한다. ‘하늘()이 곧 백성()’이고 백성이 곧 하늘이다. 즉, 백성을 위한 정치를 위해 천문을 연구하는 수학과 과학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세종 시대 천문학, 수학이 발달하고, 과학 발명품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천명을 받아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이런 유교적 철학 원리가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발명품들이 정확히 계산되고 맞아 떨어지는지 알기 위해서도 반드시 수학이 필요했다. 실록에 나타나는 것처럼 세종이 계몽산을 배우고자 한 것은 이유이다.

 

산학계몽

중국의 대표적 수학고전 『산학계몽(算學啓蒙)』

 

그렇다면 계몽산’은 어떤 책일까? 이 책은 중국의 대표적인 수학 고전인산학계몽(算學啓蒙)을 가리킨다. 이 책은 당시 중국의 대표적인 수학 고전으로써 수학의 모든 것을 망라한 교과서 같은 것이었다. 지금으로 얘기하자면, 수학물리학천문학적 지식이 다 합쳐진 산학의 정석인 셈이다. 이 책은 쉬운 문제부터 고급 수학까지 다루고 있고, 특히 중국에서 발달한 방정식 - ‘천원술(天元術)’이라 불림 - 도 들어 있다. 세종은 수학을 단순히 학문으로만 배우고 다루지 않았다. 통치의 술()로까지 받아들였다.

 

자신의 유교적 이념을 구현하는 데는 발명가 집단을 대거 발탁하고, 육성한 것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세종이 주도하는 역사 무대에 장영실이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장영실을 비롯해 이들 발명가들은 과학기기를 만드는데 수학적 원리를 활용했고, 발명품의 정밀도를 따져 보는 데에도 수학을 반드시 활용했다. 따라서 이들 집단들과 소통하기 위해 세종이 수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했다. 수학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 세종은 13(1431)에 명나라에 학자들을 보내 수학을 연구하게 할 정도였다.

 

장영실이 발명에 관여한 각종 과학 기구

 

물시계인 자격루, 옥루(玉漏), 천체관측용 기구인 대 ·소간의(大小簡儀),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와 천평(天平)일구, 고정된 정남(定南)일구, 앙부(仰釜)일구, 주야(晝夜) 겸용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등 과학 발명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학을 알아야만 한다. 작동 원리는 물론 이 같은 과학 기구의 천문 지리적 원리를 과학적으로 증명해 내기 위해서도 수학은 쓰였다.

 

특히 혼천의는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정인지, 정초 등이 고전을 조사하고, 이천, 장영실 등이 제작 감독을 맡았는데, 한양 북극 출지 38도를 정하고, 그에 따라 여러 관측 의상들을 만들었다.

 

여기서 중요한 의미가 찾아지는데, 수학적 원리 하에 서울을 지리 및 천문의 기준으로 삼는 우리 관측기구를 만들게 되면서 우리 것에 대한 자각이 커진 점이다. 15세기 조선을 위대한 과학 문명국으로 만든 힘은 수학이 가져온 또 다른 자각이기도 했던 것이다.

 

세종은 스스로 수학에 깊은 관심이 있었고, 그런 까닭에 재임 중 수학을 열심히 공부하라는 지시를 여러 번 내리기도 했다. 세종 시대 과학 기구들은 국왕인 세종과 장영실을 비롯한 수많은 장인들의 공통된 언어, 즉 수학에 크게 바탕을 둔 것이었다.

 

세종과 장영실의 만남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이 쓴연려실기술을 보면, 세종과 장영실의 뜻 깊은 만남이 잘 그려져 있다. 세종 3(1421) 즉,세종이 국왕이 된지 3년 되던 해, 세종의 나이 25세 때 일이었다. 이 해 3월 세종은 주자(鑄字)를 만들어 인쇄술을 대폭 개량하는 성과를 이미 얻어낸 상태였다. 이 젊고 패기에 찬 영명한 임금은 뭔가 획기적인 일을 도모하고 싶었다. 그 뜻이 이날의 만남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세종 3, 윤사웅, 부평부사 최천구, 동래 관노 장영실을 내감(內監)으로 불러서 선기옥형(璇璣玉衡)(혼천의를 말한다.) 제도를 논란 강구하니 임금의 뜻에 합하지 않음이 없었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장영실은 비록 지위가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은 따를 자가 없다. 너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 각종 천문 기기의 모양을 모두 눈에 익혀 와서 빨리 모방하여 만들어라.’ 하고, 또 이르기를, ‘이들을 중국에 보낼 때에는 예부에 공문을 보내서 역산학과 각종 천문 서책들을 무역하고 보루각, 흠경각의 혼천의(渾天儀) 도식(圖式)을 견양(見樣)하여 가져오게 하라.’하고 은냥(銀兩)과 물산(物産)을 많이 주었다.”

 

세종과 장영실의 역사적 만남! 그것은 신분을 뛰어넘어 천재들끼리의 만남이었다.

 

장영실은 원래 부산 동래현의 관노였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귀화한 원나라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기녀였다. 이런 신분적 한계가 있음에도 세종은 장영실을 대소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6품인 상의원의 별좌에 임명하게 된다. 이 직책은 왕실천문지리역법 연구기관인 서운관의 천문학 교수 및 고을의 현감과도 같은 지위였다.

 

일개 관노가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 할지라도 이렇게 특별 발탁이 된 예는 극히 드문 경우였다. 이런 발탁인사조치가 자칫 신분제도에 커다란 혼란을 줄까봐 신료들은 크게 반대하였다. 기득권층은 신분의 틈이 벌어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재에 대한 갈망은 세종으로 하여금 장영실을 발탁하게 했다.

 

발탁과 함께 장영실은 윤사웅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어 중국과 이슬람의 최첨단의 관측기기들을 보고 관련 책들을 구해 오게 하는 임무를 맡는다.(세종3, 1421) 자격루를 제작하기 위한 것이. 이들은 이듬해(1422)에 돌아와 세종의 명으로 천문관측소를 만들게 되는데, 시험 단계에 성공하자 세종14(1432)년에 본격적으로 대규모 천문관측소 설립에 착수하게 된다. 10년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그들이 중국에 갔다온 지 12, 천문관측소 설립에 착수한지 2년 후인 세종16(1434) 6월 마침내 자격루는 완성되어 경복궁 남쪽에 세워진 보루각에 설치된다.

 

<자격루>는 장영실이 노비 신분을 벗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발명품으로, 세종의 염원이자 기계 제작 기술자들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이 자동 물시계는 15세기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물시계였다.

 

 

 장영실이 이룬 성과와 발탁 승진의 배경

 

그렇다면 세종 시대에 장영실과 같은 수많은 인재들이 나타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세종시대 과학이 유례없이 발전한 것은 세종의 능력주의에 근거한 발탁인사가 크게 한 몫 했다. 세종이 장영실과 같은 과학 기술 분야의 숨은 보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활발한 제안과 천거제도 덕분이었던 것이다. 나아가 세종은 국가적으로 엄청난 투자를 해 장영실을 과학 기기 분야의 글로벌 인재로 키워냈다.

 

세종 710월에 양각(兩閣)을 준공하여 임금이 친히 내감에 가서 두루 보고 이르기를, ‘기특하다. 훌륭한 장영실이 귀중한 보배를 성취하였으니 그 공이 둘도 없다.’하고 천민의 신분을 벗겨 주고 승진시켜 실첨지(實僉知)를 제수하고 겸하여 물시계의 일을 살피게 하여 서울을 떠나지 않게 했고, 감조관(監造官) 윤사웅 등 세 사람에게 안마(鞍馬)를 하사하셨다.”『연려실기술』

 

세종과 장영실의 만남은 우리 과학 기술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장영실의 이런 극적인 인생은 세종 24(1442) 그가 제작을 감독한 임금의 가마가 부러지며 불경죄로 직첩(職牒)이 회수되고 곤장 80대를 맞는 처벌을 받으면서 더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 베일엔 오늘날까지도 무수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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