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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강의/세종 | 창조의 CEO

[창조의 CEO 세종] 변화의 관리자, 스피드 경영의 선도자, 세종

by 전경일 2009. 2. 3.

세종이 조선의 CEO로 재임한 15세기 초는 그야말로 대변화의 시기였다. 세계 문명사적으로 보면, 그 시기는 당나라의 귀족문화와 원나라의 세계문화가 우리 고유의 토착 문화와 융합되면서 새로운 한국 문화를 꽃피우려 하던 시기였다. 게다가 원ㆍ명 교체기는 국제적으로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는 시기였다. 국운 융성의 대(大) 르네상스는 이러한 변화 - 오늘날에도 조차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으로 이해되는 바로 그 ‘변화’ -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


[세종, 온몸으로 변화를 감지하다]


성장기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탁견을 갖게 된 세종은 바로 이 ‘변화’에 주목했다. 세종은 이 점을 고려가 망해 가는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변화하는 시대에 걸맞는 지혜를 얻고자 사서(史書)를 펼치면, 거기엔 각 시대 동서고금의 역대 CEO들이 무엇을 했고, 또 무엇을 놓쳤는지 수많은 선례들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조선의 4대 CEO에겐 이 모든 것이 보고 배울 수 있는 벤치마킹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취임 전 2개월 동안 자신을 변혁의 시대에 맞는 CEO로 빠르게 재창조했고, 그러한 자기 혁신의 노력은 그 후로도 지속되었다. 세종은 ‘발전’이란 ‘끝이 없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차원에서 자신과 조선의 모든 면을 계속 갱신해 나갔다. 이 시기 세종이 국가 경영에서 추구한 주요 원리는 ‘변화’였다. 그는 조선이 처한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자 했다. 그것은 바로 중국이라는 존재와 조선이라는 한 국가가 가진 현실 조건의 차이에 대한 것이었다. 세종은 바로 그런 ‘문제’속에서 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두려움을 뒤로 하고, 처음의 길을 가라]


그러나 새로운 시도라는 것은 실로 두려운 것이었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다간 조선의 경영권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물론 그 무렵 조선의 경영권은 전임 CEO의 활약으로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쓸데없이 무리한 모험을 해서 만일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세종은 ‘실패한 CEO’가 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무리수를 둬서 위험에 노출될 필요란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세종은 두려움에 직면해 그것과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했다. 세종은 가슴이 떨렸다. 전임 CEO이자 부왕인 태종이 경영 지도를 해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22세의 청년에게 국가 경영은 그야말로 두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자신 아직 완전히 국가 조직을 장악했다고 믿어지지도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CEO가 된다?


그러나 세종은 그런 두려움과 ‘내가 과연 해 낼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떨치고 일어섰다. 그리고 마침내 해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면에서 이전의 창업자들보다 훨씬 더 업-그래이드(up-grade) 된 ‘신생 조선’을 만들어 냈다.


[모든 변화 프로그램을 신속히 가동하라]


세종은 조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의 현실을 남들이 바꾸도록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사대(事大) 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세종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에 어떤 문제점이 있고, 이를 개선해 나갈 방안이 뭔지를 찾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경영을 통해 보다 이상의 경지 즉, ‘업-그래이드된 사회(up graded society)’를 지향하고자 했다. 세종은 자신이 구상했던 모든 변화 프로그램을 신속하게 가동했다. 그것은 그 자신이 변화를 주도하는 CEO로서 개혁과 혁신의 선두에 서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은 변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기꺼이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조선을 떠올렸다. 조선의 창업이 그랬듯이, 새롭게 시작하지 않는 한, 창조적이며 혁신적인 국가가 자리 잡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새로움’이라는 것은 활발한 아웃소싱과 벤치마킹을 통해 지구 저편 다른 문명의 꽃을 ‘조선’이라는 어린 나무에 접목시키는 것으로 이어졌다. 선진 문물의 수입은 바로 그러한 배경에서 이루어 진 것이었다. 그런 작업은 우선, 이슬람 ‘문명에 대한 이식(移植)작업’으로 나타났다. 신생 조선의 용광로를 뜨겁게 달구기 위해 그야말로 아웃소싱과 벤치마킹 정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경일, <창조의 CEO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