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인문역사/그리메 그린다 | Posted by 전경일소장 전경일 2017. 7. 11. 17:21

여름 부채로 더위를 쫒는 법

여름 부채로 더위를 쫒는 법

 

“이 부채를 자네에게 주노니 여름 더위를 쫓게나.”

 

여름이 한창이다. 성하(盛夏), 농익을 때로 농익은 더위요, 푹푹 가마솥처럼 찔 때로 찌는 일기다. 이럴 때 두 발 풍덩 찬물에 담그고 수박을 먹으며 그간 못 읽은 책을 읽는다면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그 보단 부채를 부치다 지인이 써준 몇 글자를 탐미해 보는 건 어떤가?

 

내가 써주었던 그 부채들은 다들 어디에 갔나? 부채들이야 그렇다 치고, 먹물 짙게 배인 글들은 지금 어디선가 다른 이의 더위를 쫓고 있지 않을까? 그간 써준 글귀들을 떠올려보니, 감회가 자못 새롭다.

 

독성(獨醒) - 스스로 깨우치라는 뜻이다.

 

좌벽관도, 우벽관사(左壁觀圖, 右壁觀史) - 왼쪽 벽에서 그림을 보고, 오른쪽 벽에서 역사를 본다는 말이다. 양관이란 사람의 방을 묘사한 말이다. 이 사람은 방 가득히 책을 쌓아놓고 여한 없이 독서를 하였나 보다.

 

탄금선풍(彈琴扇風) -거문고 타고 부채질하네. 이 말도 멋지다. 같은 급으로는 옥류선풍(玉柳扇風)을 들을 수 있겠다.

 

달빛에 발을 씻는 월하탁족(月下濯足)은 어떤가?

그 강물 밟아 보아도 예전 강물 아닐지니 옛 강물 밟고 이 여름을 건너간다.

 

옛 선인들은 이처럼 여름 더위를 부채글로 이기고자 했다. 더위신(暑神)을 몰아내고자, 나름 피서법을 개발한 것이다.

 

 

부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부채에 그려진 그림은 더욱 청량감을 주었으리라.

 

한국 화단의 거봉 안견의 ⟨만학쟁류도(萬壑爭流圖)⟩에 쓰인 글은 여름 더위를 한방에 날려준다. 서거정이 쓴 ⟨안견만학쟁유도(安堅萬壑爭流圖)⟩를 감상해본다.

 

폭포는 몇 가닥이나 흘러 떨어지는고 낭떠러지 암석을 부딪고 절벽으로 쏟아져 수많은 주옥을 흩어서 눈발처럼 뿜어대고... 혹은 은하수가 중천에 비껴 있는 듯하고... 어떻게 하면 포도주로 바꾸어 만들어서 단번에 삼백 잔 술을 유쾌히 들이키어 내 십 년간 뿌연 먼지에 찌든 자취를 씻어 볼꼬.

 

그림 속 멋진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에서 십년 동안 쌓인 티끌을 한꺼번에 씻어내고, 그 물의 청량함을 빌어 포도주로 만들어서 단번에 삼백 잔을 쭉 들이 키고 싶다는 거다. 호쾌함과 장려함이 동시에 터져 나온다. 이 시는 이백(李白)의 시⟨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에 나오는 구절을 비유해 읊은 것이다. 한바탕 일필휘지한 시선(詩仙)의 시를 읊조려 본다.

 

햇빛이 향로봉 비추어 붉은 놀이 생겼는데,

멀리 보니 폭포는 전천이 거꾸로 걸린 듯하네.

삼천 척 높이를 곧장 쏜살같이 내리 쏟아라.

아마도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닐까.

 

금강산은 ‘붓 끝으로 먹고 산다’고 하여 ‘호생관(毫生館)’을 호로 삼은 사나이 최북(崔北) 떼놓고 볼 수 없다. 숨통이 꽉 막힌 신분사회에서 그는 어느 날 가 본 금강산 구룡폭포에 넋을 잃고는 몸을 던지기에 딱 좋았으리라.

 

“금강산 구룡폭포에 들어 대단히 기뻐하여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 문득 울고 웃고 하더니, ‘천하의 명인(名人) 최북은 마땅히 천하의 명산(名山)에서 죽어야 한다.고 하고는 몸을 못에 던졌다.”

 

이른바 최칠칠이의 금강산 구룡폭포 자살소동이 이것이다. 다행이 죽지 않았으니 보는 사람이나 본인이나 피서는 제대로 한 꼴이다. 지금도 구룡폭포는 직하수(直下水)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떨어져 세상으로 흘러간다. 그 물 소리에 여름 더위도 자들한 우리 삶도 가신다.

 

여름 부채의 대가는 아무래도 겸재 정선이다.

 

무더운 여름철, 그가 그린 금강산 부채는 궁중 안팍에서 더위를 쫓는데 최고의 히트작이었다. 두루두루 요즘 요행하는 재능기부도 하고 산 셈이다. 이런 너른 품이 있으니 이 여름은 더 시원하지 않을까? 정선은 나이 예순 일곱(1742) 시월 보름날, 임진강에서 배를 띄웠다. 때마침 임술년 시월 보름날이라 옛날 송나라 소동파가⟨후적벽부(後赤壁賦)⟩를 지은 것이 생각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름 밤배는 가뭇없이 흘러가고, 달은 휘황찬란하다. 인생은 이 밤처럼 멋진 풍류와 시화가 어우러진다.

 

어떤가? 지금 끌어안은 그 진애를 놓고 옛 선인들의 예술에 빠져 더위는 두고 감이.

 

 

ⓒ인문경영연구소, 전경일 소장. 저서 <그리메 그린다> 외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