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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관리/세계적인 경영 구루들의 경영비법

(1)이케아 창업자 잉바르 캄프라드의 리더십

by 전경일 2018. 3. 5.

이케아 창업자 잉바르 캄프라드가 최근 사망했다. 

그의 원가 절감과 DIY’ 리더십을 알아본다

 

 

1951년 스웨덴 남부 말뫼 출신의 디자이너 일리스 룬드그렌(Gillis Lundgren)은 곤경에 처했다. 신생 가구회사인 이케아의 직원이었던 그는 자신의 차로 조그만 탁자를 운반하려다 난관에 부딪혔다. 아무리 애써도 그의 좁은 차 트렁크 안에는 다리 4개가 달린 탁자가 들어가지 않았다. 룬드그렌은 투덜거렸다. “세상에. 이 조그만 탁자가 얼마나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거야. 에라 모르겠다. 다리를 잘라 상판 아래 붙여버리자.”

 

한 젊은 디자이너의 번뜩이는 재치가 세계 가구 및 유통 산업의 판도를 바꾸고 세계적인 대부호를 탄생시키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다리를 자른 탁자부품을 상자에 담아 운반하고 이를 소비자가 직접 조립하게 하는 가구라는 콘셉트의 플랫 팩(flat pack) 가구로 발전했다. 당시만 해도 가구란 한번 사면 죽을 때까지 써야 하는 것, 부모님께 물려받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팽배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획기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룬드그렌의 아이디어를 사업에 적용해 세계적인 거부가 된 인물이 바로 그의 상사이자 이케아(IKEA)의 창업주, 잉바르 캄프라드(Ingvar Feodor Kamprad). 그는 약 70년간 이케아라는 거대 유통기업을 소유하면서도 일반인에게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은둔형 리더이다. 하지만 그의 독특한 리더십만큼은 이케아의 철학과 성공을 통해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는 절약과 검소함이 미덕으로 꼽히는 환경에서 자라며 탁월한 리더가 되는 법을 몸소 터득했다.

 

캄프라드는 19263월 스웨덴 알름훌트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지역은 1년의 절반이 눈보라에 휩싸이는 척박한 시골마을이었기에 주민들은 생활력과 자립심이 유달리 강했다. 소년 캄프라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돈벌이에 남다른 소질을 발휘했다. 다섯 살 때부터 성냥, 엽서, 연필 등을 팔아 돈을 벌었다. 17세에는 집 앞 창고에서 시계와 크리스마스카드를 팔면서 일종의 잡화상인 이케아를 창업했다. ‘이케아(IKEA)’라는 기업명은 그의 이름인 잉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 그가 유소년기를 보낸 농장의 이름 엘름타리드(Elmtaryd), 엘름타리드가 소재한 마을 아군나리드(Agunnaryd)의 머리글자인 I, K, E, A를 따서 만들었다.

 

1948년 가구업에 본격적으로 손을 댄 그는 1951년부터 카탈로그 인쇄를 시작했다. 1950년대 스웨덴 정부는 주택 100만 채 건설이라는 정책을 내놓으면서 이케아의 성장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캄프라드는 1958, 오늘날 이케아 매장의 토대가 된 가구 전용매장을 설립했다. 당시만 해도 오로지 가구만 파는 매장은 찾아보기 힘들 때였지만, 고객들은 가구 재료를 납작하게 포장해 이를 개인차에 싣고 집에 가져갈 수 있다는 점에 열광했다. 캄프라드는 이내 스웨덴 굴지의 사업가로 부상한다.

 

 

1. 고객이 만족할 수준으로 가격을 혁신하라

이케아는 세계 최대의 다국적 가구 기업이지만, 부유층을 위한 호화롭고 비싼 명품 가구는 제공하지 않는다. 잉바르 캄프라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나은 일상을 만들어주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이케아는 이를 위해서 일반 대중도 부담 없이 구매할 수 있는 가격에 양질의 가구를 판매해 왔다. 이케아의 가격정책을 당해낼 수 없었던 경쟁업체들과의 반목도 끊이지 않았지만, 캄프라드는 그때마다 혁신적인 타개책을 내놓으며 오히려 더 큰 성장의 토대를 마련했다. 어떤 조건과 환경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의 명확한 비전과 리더십은 그대로 이케아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게 된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브랜드중의 하나인 이케아는 매년 4억명 이상이 구매하며 35개국 이상에 253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잉바르 캄프라드는 17살에 IKEA를 설립하였는데, 고객이 간단히 조립할 수 있는 형태로 제공되는 가구로 명성을 얻으며 세상 시장을 석권해 간다. 저렴한 가격과 품질 그리고 뛰어난 디자인인 이케아가 지닌 가치다. 또한 고객들이 직접 가구를 체험할 수 있는 신개념의 매장을 운영하여 가구 혁명을 일으켰다. 그의 성공 비밀은 원가절감과 ‘DIY 경영에 있다.

 

 

핫도그 전략-뜨거운 가격

잉바르 캄프라드는 간이음식점에서 파는 핫도그나 고기완자 따위를 좋아했다. 이케아가 각 매장에서 핫도그를 팔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데 그런 그의 기호가 반영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캄프라드가 이케아 경영진에게 이런 제안을 할 때 이미 그의 나이는 칠십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때까지도 회사의 새로운 제품과 가격을 일일이 관리하고 있었고 핫도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핫도그를 다른 음식점에서 파는 가격의 절반 수준으로 팔기를 바랐고, 이런 가격 정책이 바로 핫도그 판매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캄프라드는 핫도그를 통해 이케아에서 물건을 사는 것이 얼마나 저렴한 것인지를 대중에게 다시 한 번 각인시키려 했다.

 

그는 핫도그를 가장 합리적인 비용으로 판매할 수 있는 방안을 두고, 레스토랑 전문가들과 끊임없이 토론하고 실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핫도그 판매도 이케아의 가구 조립처럼 고객들이 함께 일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고객이 핫도그를 판매원에게서 받으면 자기 입맛에 맞게 직접 소스, 볶은 양파와 오이절임 등을 넣는 것이다. 캄프라드는 핫도그의 수요가 시간당 300개 이상으로 높을 경우 보통 가격의 절반 이하에 판매하더라도 이윤을 남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져, 이케아 핫도그는 1995년 판매를 시작한 이래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이 사업은 세계 전역으로 확장되었고, 가격은 가능한 한 해당 국가의 동전으로 지불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이케아는 핫도그 판매점을 가구 매장 계산대 뒤, 그리고 매장 출구 앞에 설치했다. 그리고 핫도그 외에도 커피, 소프트음료, 아이스크림 등을 싼값에 팔았다. 그 식당은 고객들에게 쇼핑의 수고와 노력에 대해 심리적 보상을 해준다. 이케아 임원진들은 고객들이 계산대를 통과한 후 무겁고 다루기 힘든 물건들을 차에 차곡차곡 실기 위해 힘을 재충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핫도그 사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캄프라드는 가격에 대한 확실한 원칙을 가지고 있다. “이케아에는 고객들을 숨 막히게 만들 수 있는 가격의 제품이 몇 가지는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믿지 못할 만큼 싼 물건들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저렴한 가격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마치 핫도그처럼 보통의 소비자들이 재빨리 지갑을 열 수 있는, 항상 필요한 물건이어야 한다.

 

캄프라드는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런 뜨거운 가격 전략을 이용해 왔고, 1990년대에 들어서 이 전략을 공식화시켰다. 그는 이케아 임원들에게 핫도그와 마찬가지로 척 보는 순간 놀랍도록 낮은 가격으로 인식될 수 있는 품목을 제품 목록에 10개 더 추가하라고 지시했다. ‘이라는 이름의 석재 컵은 이 새로운 제품들 중 하나이다. 값싼 컵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케아의 제품 목록에 있었지만, 그 컵들의 가격은 캄프라드에게 있어 인상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컵의 가격은 다른 제품군에 비해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낮은 가격은 자연스럽게 수요를 불러 모았고, 그 모델은 기존 모델보다 18배 이상의 판매율을 기록했다.

 

세계 전역에서 이케아는 같은 품목을 제공한다. 구매 가격을 낮추는 데 필요한 많은 구매 수량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중국의 젓가락이나 길이가 유난히 긴 네덜란드의 침대와 같이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이케아의 디자이너들은 국가별 선호도를 고려한 제품을 디자인한다. 디자인의 현지화이다.

 

 

생산방식의 혁신

이케아의 혁신은 생산방식에서도 찾아진다. ‘많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더 낫게 만든다.’는 사명이 이케아를 그러한 방향으로 선도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사실이지 이케아의 생산방식이 혁신적이게 된 주요 이유는 초창기부터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에 스웨덴의 가구상연합은 전국 공급업자들에게 이케아를 보이콧하도록 엄포를 놓았다. 이케아가 업계에 변혁을 가져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스웨덴 밖에서 공급업자를 찾던 캄프라드는, 폴란드가 스웨덴 회사들과 제휴를 맺는 데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폴란드는 물가가 쌌으므로 캄프라드는 그곳 공급업자들과 장기계약을 맺어 기존의 절반 가까운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이케아가 폴란드에 한 첫 주문은 69,000크로나(8,625달러) 수준에 불과했지만, 1998년 폴란드 수출액은 무려 20억 크로나(3억 달러)로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일부 폴란드 공급업자들이 이케아 제품 생산 비용을 인상하려 했고, 심지어 일부 제조사들은 캄프라드가 투자한 기계를 이용해 다른 클라이언트의 주문을 조달했다. 이케아는 공급업자와 제조업체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1991년 스웨드우드(Swedwood)라는 임업회사를 인수하였다. 현재 스웨드우드 그룹은 스웨덴, 발트 해, 중부 유럽, 캐나다 등 9개국에 36개의 공장을 가지고 있으며, 연 매출은 13억 유로에 달한다.

 

이케아는 자사 업체와 외주 업체를 총동원해 가구를 생산한다. 이케아 제품 중 스웨덴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별로 없다. 주로 재료가 원활하게 수급되고 숙련된 노동자를 갖춘 폴란드, 불가리아, 아시아 지역의 나라들이 이케아의 생산 국가로 선정된다. 이케아는 현재 50여 개국에 약 1,350개의 공급업체를 거느리고 있다.

뤼디거 융블루트가 지적하듯, 가구왕국 이케아의 상상을 초월하는 성공 이야기에는 생산방식의 혁신이 큰몫을 차지하는 것이다.

 

 

무가치한 재료란 없다

이케아의 낮은 가격의 핵심은 값싼 재료에 있다. 이케아의 디자이너들은 항상 비싸지 않으면서 품질은 좋은 재료를 찾는다. 1960년대에 이케아는 전통적으로 가구 제작에 사용되던 티크 나무를 그보다 덜 비싼 참나무로 대체하는 트렌드를 주도했고, 1970년대에는 저렴한 소나무 가구가 보급되는 데 기여했다. 특히 1960년대 파티클 보드의 도래는 이케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용되는 나무의 양과 무게를 줄이기 위해 샌드위치 같은 틀에 눌러 만든 합판으로 원목을 대체한 보드 온 프레임(board-on-frame)’ 제품들은 이케아에 커다란 성공을 안겨주었다.

 

초창기 스웨덴에서의 압박과 보이콧은 이케아로 하여금 이에서 더 나아간 혁신적인 재료를 찾아내게 만들었다. 캄프라드는 단순히 싼 것이 아니라 거의 무가치하게 여겨지는 재료를 재활용할 수 있다면 매우 저렴한 제품을 생산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캄프라드가 중국 재래시장에 갔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이케아는 가구 사업만 하고 있었는데 캄프라드는 재래시장에 줄지어 늘어선 털 뽑힌 닭들에 넋을 빼앗겼다. 그는 뽑아낸 깃털을 중국인들이 쓰레기로 취급하며 버린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캄프라드는 그 즉시 시장 상인들과 깃털 매입을 위한 계약을 체결했고, 그 결과 이케아는 오리나 거위 깃털로 채운 것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깃털이불 수백만 개를 생산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이케아가 가격을 낮추기 위해, 그리고 공급 보이콧을 우회하기 위해 색다른 공급업자들을 활용한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이케아는 전에 한 번도 가구를 만들어본 적 없는 제조사들을 자주 이용했는데, 그 이유는 단순명료했다. 그들이 제품을 더 싸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케아 제품의 재료들>

쇼핑카트의 철망으로 만든 소파

스키를 이용해 만든 탁자

창문 공장에서 만든 탁자 다리

(door) 공장에서 만든 침대의 헤드보드

셔츠로 만든 쿠션 커버

플라스틱 양동이로 만든 의자

자동차 타이어로 만든 액자

 

폐기품이라 불러도 될 이런 재료들로 이케아는 가구 재료의 혁신을 이끌어 낸 것은 물론, 남다른 소재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디자인 영역을 구축해 내고, 환경 기업으로서의 이미지도 살릴 수 있었다. 일거삼득의 효과를 거둔 것이다. ⓒ전경일 인문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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