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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보기고

홍대용, 실학을 통해 혁신의 정신을 세우다

by 전경일 2021. 3. 8.

“한평생 정력을 소모하여 100여권의 잡다한 글을 만지기는 하였으나, 이는 결국 학문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세상의 종이값이나 올리고 학도들의 안목을 혼란케 할 뿐이니, 이야말로 근세 선비들의 골수에 가득 찬 고치기 어려운 병이다.”

 

이 말은 짐짓 실제를 구하지 않는 다른 선비들을 질타하는 말인 듯하나, 실상은 자신을 향해 내려치는 날카로운 죽비의 꾸짖음이다.  이 같이 날선 자기비판은 조선후기 실학자인 담헌 홍대용이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이다. 그는 왜 이처럼 날선 자기 부정을 하였던 것일까. 그것은 껍질을 깨부숨으로써 올곧게 속살을 드러내려 한, 그만의 투철한 자기 의지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엄격한 자기 부정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인물, 홍대용은 누구인가?

 

담헌 홍대용은 1731년 서울의 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에는 대학자인 이원행으로부터 글을 배워 과거를 통한 그의 출세길은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중간에 돌연 행로를 꺾어 버린다. 벼슬과 유관한 전()과 경()이 아닌, 당시로서는 외도(外道)에 불과한 과학 분야로 나아간 것이다. 권력과 부와 관련 없는 분야가 그가 선택한 길이었다.

 

 

왜 그랬을까? 길고 멀리 보면 그는 요즘식으로 무효경쟁에 자신의 인생을 투여하지 않고 보다 의미로운 길을 개척하겠다는 의지로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이 같은 죽비와도 같은 각성이 앞의 말에는 드러나 있다.

 

인생 도정에서 고민하던 그에겐 세상을 넓게 볼 거대한 순간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바로 1765, 조선사신의 일원으로서 청나라에 파견되는 숙부를 따라 연경에 가게 된 것이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그는 거기 가서 직접 두 눈으로 중국의 생산기술과 문명, 그리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동안 조선은 잠자고 있었구나......!’

 

절박한 깨달음이 폐부를 찔렀다. 그는 현지에서 항주의 학자 반정균(潘庭筠)과 엄성이라는 선비를 만나 필담을 주고받으며 학자로서 인연을 맺었다. 그 인연은 60년 후 반정균의 손자 반공수와 홍대용의 둘째 손자 홍양후에게로까지 넘어간다. 실로 국경을 넘는 영혼의 교류가 이어진 것이다.

 

북경에 갔을 때, 담헌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한 것은 천주당이었다. 그는 북경에 체류하는 5일 동안 천주당을 찾아가 당시 북경에 체류하던 독인인 할러슈타인, 고가이슬을 찾아 서양 문물과 천주당에 대해 문의하고, 직접 눈으로 서양식 관상대를 관찰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수위에게 간절히 부탁하여 보게 된다. 더 오래 볼 수 없음이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촉박한 시간으로 충분한 관찰과 연구를 하지 못하고 돌아온 담헌은 귀국 후 중국 친구들과 깊은 교분을 맺고 학술을 논하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천학초함(天學初函)은 내가 평생 보고자 하는 책입니다. 그 책 수가 적지 않게 많은걸 알지만 이렇게 먼 곳에까지 무슨 방법으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홍대용의 이 같은 안타까운 토로에 반정균은 10년만에 겨우 그 책을 얻어 그것도 후반부만 보냈다. 실로 깊고 끈끈한 지적 교유였다.

 

근세로 넘어오는 거대한 변화가 용틀임하는 시기에 홍대용은 9년 동안 관직생활을 했지만,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과학에 있었다. 그의 두드러진 업적은 천문, 역법, 산수(算數) 분야로 이 분야를 통섭해 끝내 혼천의기(渾天儀器)를 만들어 내게 된다. 이것은 조선 역사상 최초의 현대식 천문의로 평가되고 있는 홍대용 연구 결과물의 쾌거로 볼 수 있다.

 

그는 우주 연구에 있어서도 가장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했는데, 다름아닌 지구 자전설이 그것이다. 이전까지 조선 사람들은 하늘을 둥글고 땅은 평평하고 해는 지구를 돈다고 믿었는데, 담헌은 전혀 새로운 지동설을 주장했다. 그것은 관념적 유학의 세계 질서를 부정하고 과학적으로 세상을 보는 가운데 돌출된 것이다. 이처럼 시대를 앞서 나가는 그의 탐구 정신과, 세상을 부정하고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탐색한 그의 혁신적인 정신은 미래를 성큼 앞당긴 것이었다.

 

스스로 학문을 하는 철학으로 실제를 구하고자 했던 담헌은 과학분야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에서도 근세의 싹을 여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선구자적 면모가 바로 이런 점이다. 그는 신분 고하를 불문하고 누구든 노동을 해야 하며, 오로지 재능과 학식을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방 문제에서도 38만명의 직업군인을 둘 것과 탁월한 부국강병의 견해를 제시했다. 또한 학교를 세워 8세 이상의 모든 아이들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부 지배층과 유학자들의 사대주의를 배격하고 자주성을 가질 것을 주장하였다. 오늘날 시각으로 봐도 가히 혁신적 선구자라 할만하다.

 

만일 그의 주장대로 우리가 18세기 무렵, 각 분야에서 혁신을 이뤄내는 작업에 착수하였더라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구한말 외세에 의해 강점되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혁신은 시기를 놓치고 나면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만다. 내부적으로 순혈주의와 작은 기득권에 매몰되어 과감한 변혁을 꾀하려는 시도가 없을 때에는 어느 조직이든 주춤주춤하다가는 어느새 시장에서 밀리고, 역사에 남지 않게 된다. 따라서 지속적인 혁신에의 노력이 국가는 물론 기업 갱신에의 조건임을 우리는 담헌 홍대용의 활동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세계 경제가 심상치 않다. 세계 경제의 불안정성이 우리 중소기업들엔 더 큰 위기로 다가오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런 때에 자사만의 고유한 경쟁력으로 외풍을 맞을 준비가 된 기업은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생존의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기술혁신, 독특한 사업모델, 고객집단 확보, 남다른 신시장 개척, 조직력의 우위와도 같은 조건들은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지금은 맹추위를 견뎌 나갈 더 강한 내적 조건을 갖출 시점이다.

 

지금을 굳이 역사적 시점에서 따져본다면, 담헌 홍대용이 근본적인 변화를 주창했던 바로 그 시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때 조선의 선택이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결정했듯, 지금의 우리 선택이 미래의 한국경제를 결정하게 될 것은 누가 봐도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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